스페인/포르투칼 제 8일, 9일 (2022년 07월 08일 ~ 7월 9일, 금,토요일)
프라도 미술관 탐방후 귀국
<항공편 이동 예정>
7월 8일(8일차) 마드리드 ~ 두바이
[14:25] EK142 마드리드 바라하스(Aeropuerto Adolfo Suárez Madrid-Barajas) 국제공항 출발(약 7시간 35분 소요)
[00:25] 두바이 도착
7월 9일(9일차) 두바이 ~ 인천
[03:30] EK322 두바이 출발(약 7시간 소요),
[16:50]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T1) 도착
<프라도 미술관 ~ 마드리드 공항이동 경로>
이동거리 : 14.9km
이동시간 : 20분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
미술관 명칭인 '프라도(Prado)'는 '초원'이라는 뜻으로
예전에 귀족들이 본인의 대저택 정원에 손님들을 초대하여
본인이 소장한 그림을 자랑하려고 전시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한다.
세계 3대 미술관인 프라도 미술관은 1785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는데
원래는 자연과학 박물관이 될 예정이었다.
설계를 담당했던 사람은 당시 스페인의 대표적인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였다.
그러나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었고,
전후에는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스페인 왕가의 미술품을 소장하는 미술관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1808년 반 나폴레옹 독립전쟁 기간 동안 많은 부분이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으나
페르난도 7세의 명령에 의해 복구되었고,
1819년 왕립 미술박물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는데
박물관은 회화, 삽화, 조각등 5.000여점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세계적 미술 박물관으로서 중세부터 18세기 말까지 모든 미술 학파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소장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었다.
펠리페 2세(1556~98 재위)는 카를로스 5세(1516~56 재위)의 소장품을 확장했는데,
이 두 왕은 모두 티치아노의 중요한 후원자였다.
펠리페 4세(1621~65 재위)는 그의 궁정 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시켜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구입해 오도록 함으로써 왕궁의 소장품들을 더욱 늘렸다.
펠리페 5세(1700~46 재위)는 여기에 프랑스의 바로크 작품들을 덧붙였으며
페르난도 7세는 새로 지은 프라도 미술관의 건물에
여러 왕의 수집품들(에스코리알에 있는 것들은 제외)중에서 회화를 전부 한데 모았다.
1872년 예전에 스페인의 수녀원과 수도원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많은 중요한 그림들이 이 미술관으로 넘어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다른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집품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스페인 왕가의 방대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왕실 전용 갤러리가
국립 미술관이 된 뒤에도 귀중한 미술품의 수집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소장품 약 3만여점중 3천여점만 전시되고 있다.
작품 구성을 보면 역시 스페인 회화 부문이 충실하다.
스페인 회화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엘 그레코 고야, 데이고 발레스케스를 비롯해
16~17세기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에 활약했던 화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스페인 왕실과 관계가 깊었던 네덜란드의 플랑드르파 작품도 많고,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와 보티첼리 등 이탈리아 회화 작품도 충실하다.
더불어 이곳에는 대(大)피테르 브뢰헬, 라파엘로, 틴토레토, 파올로 베로네세, 페테르 파울 루벤스,
렘브란트, 안토니 반 데이크,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앙투안 와토 등의 주요 작품들과
훌륭한 그리스-로마풍의 조상들도 수집되어 있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 3대 거장의 전시관은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이고,
그 밖에 티치아노, 루벤스, 리베라, 무리요, 수르바란의 작품들도 눈여겨볼 만하다.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벨라스케스의 《궁녀들(Las Meninas)》,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La Maja Desnuda)》, 《옷을 입은 마하(La Maja Vestida)》등이 있다.
그 외에 독일, 프랑스 등 유럽회화의 걸작,
고대의 조각 작품군도 전시되어 있어 천천히 관람한다면 하루는 족히 소요된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문이 3개 있는데 각각의 문에는
고야, 벨라스케스, 무리요의 동상이 입장하는 관람객을 맞이 하듯이 서 있다.
2013년부터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유료로 대여할 수 있으니
오디오를 통해 주요 작품의 설명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고,
보안 검색 때문에 입장할 때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미술관내에서는 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나 로비에서는 가능하고 큰 짐은 보관소에 맡길 수 있다.
▼ 마지막!!
그야말로 마지막 일정으로 대망의 프라도 미술관 관람을 하게 된다.
전용버스에서 하차 하자 마자 프라도 미술관이 내려다 보이는데 외벽을 수리하고 있었다.
▼ 프라도 미술관은 3개의 출입구가 있고,
각 출입구에는 고야, 벨라스케스, 무리요 3개의 동상이 조성되어 있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는데
우리는 고야의 동상이 있는 '고야의 문'에서 관람을 하게 된다.
▼ 우선 그 고야 동상 앞에서 인증하는 것으로 프라도 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휘날리는 듯한 망또(코트?)는 미술가가 아닌 마치 영화배우 같은 모양새로
멋진 코트와 손에 들린 모자등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고야의 동상모습 이었다.
▼ 프라도 미술관 입구에는 이처럼 전시하고 있는 포스터가 여러곳에 부착되어 있었다.
▼ 출입구 앞에서 티켓팅 하는 대기 시간을 잠시 보낸 후에,
▼ 출입문을 들어 서서 로비로 들어 간다.
전시실 안에서는 촬영이 불가하다 하니 이 로비에서의 사진이 마지막 사진이 되겠다.
▼ 작품들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니 서운한 마음에 프라도 미술관에 대한 내용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고야의 옷벛은 마야" 등 그림 몇 점과 그에 대한 설명을 넷상에서 얻어 여기에 남겨 보았다.
< 프라도 미술관 평면도>
<프라도 미술관 작품 전시물 내용>
<프라도 내부 전시실중 한 장면>
<프라도 조각 전시실>
프라도 미술관 1층에는 엘 그레코의 작품을 비롯해 15~16세기에 활동한 스페인 국내외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고야, 벨라스케스와 함께 스페인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엘 그레코는 '가장 순수한 스페인의 혼을 표현한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은 <성 삼위일체>, <수태고지> 등 모두 39점이다.
그 중에서도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의 초상>은 엘 그레코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15~16세기 플랑드르파 회화의 대표작으로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정원>과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가 전시되어 있다.
15~16세기의 이탈리아 회화로는 르네상스의 주역 라파엘로의 <양을 모는 성가정>,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 이야기>,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등 종교화의 대작들이 있다.
미술관 2층에는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를 비롯해 17세기 유럽에서 활약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왕족의 초상화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남긴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으로는
<라스 메니나스>, <브레다 성의 항복> 등이 있다.
17세기의 스페인 회화는 벨라스케스 외에도 수르바란, 무리요 같은 대가들의 작품들도 있다.
17세기의 플랑드르파 회화로는 루벤스의 <성가정>, <사랑의 정원>, <세 여신> 등 수 많은 걸작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 회화로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스페인 회화의 보물인 고야의 작품은 2~3층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시 면적이 작은 3층은 고야의 전용 전시실이나 마찬가지다.
<마드리드의 축제>, <술래잡기> 등 그의 초기작들은 주로 스페인의 일상적인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밝은 분위기의 작품이 많다.
고야가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가 되어 그린 <카를로스 4세 일가>,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 등을 거쳐,
인간 내면의 고뇌와 갈등을 주로 표현한 만년으로 이어지는 작품 세계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으로 17세기 스페인 화단의 최고 작가로 손꼽히는 화가이다
궁중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난쟁이들을 궁중에 불러들여 왕족들은 즐거움을 가졌다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1746 ~ 1828년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
: 스페인의 천재 화가이며 궁정 화가로 대표작으로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가 있는데,
마하란 뜻은 '옷을 잘 차려 입은 이쁜 모습의 여인' 이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고야는 비교적 오래 살아 82세에 사망하였는데 옷벗은 마하, 옷입은 마하는 그의 나이가 70이 넘어 그린 누드화이다.
1. 옷을 벗은 마하 1799~1800년 제작
대부분 누드화의 여자 모델은 전설속 여신의 모습이고, 남자들은 육체미 선수 같다.
심지어 성화속 예수도 보면 근육질의 건강한 남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옷벗은 마하는 한 눈에 보아도 팔등신 여신의 모습이 아닌 사실 그대로 그려진 그림으로
당시의 화풍 내지는 정서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2. 옷을 입은 마하 : 1800~1803년 제작
이 옷입은 마하는 고야가 재판 증거용으로 옷입은 작품을 하나 더 제작해서 종교재판에서 사형을 면하였는데
이 그림은 재판에 증거물로 제출하기 위해 급조한 그림이었기에 작품으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림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실제로 본 이 그림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색채감이 살아 있는 듯하고,
옷감의 질감이 실제의 것을 보는 듯하였다.
이 두 개의 그림에 대한 전설(??) 이 내려 오고 있다하여 그 내용을 기록해 본다.
그 당시 동일한 카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에서는 누드화, 누드 조각 등이 활성화 되던 시점이었지만
같은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누드화는 금기시 했고,
누드화 '옷벗은 마하'를 그린 고야를 종교재판 회의에 회부 했었다.
고야는 종교재판에서 변명의 확실한 증거물 제출을 위해 급하게 '옷입은 마하'의 작품을 그렸어야 했다.
그래서 한 여자를 모델로 옷을 벗고, 입고 2개의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재판 증거물로 제출하기 위하여 급하게 그려냈던
'옷입은 마하'는 전작인 옷벗은 마야에 비하여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현대인들은 줄을 서서 팔등신도 아닌 여인을 흥미롭게 관람하게 되었는데,
고야의 옷벗은 마하는 실물 그대로 체모까지 표현한 그림으로 고야는 그 시대의 반항아 였다.
'마하'라는 단어는 '멋쟁이 여인'이라는 뜻으로 이 옷입은 마하라는 그림은 위와 같은 탄생 비화가 있었다.
그 시기에 같은 카톨릭 국가인 이태리는 누드화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고 있었는데
스페인에서는 다른 노선으로 누드화가 금기시 되어 누드화를 그린 화가는
사형이라는 처벌을 받고, 그림은 없애 버렸다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인 옷입은 마하로 인하여 고야는 사형은 면하고 그림도 살아 남게 되었으니
그 덕분에 명화로 남아 세상에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주게 된 것이다.
고야는 왕비의 정부였던 ‘마누엘 고도이’ 총리의 부탁으로 '옷벗은 마하' 란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종교재판에서 고야가 사형을 면하고 이 옷벗은 마하라는 그림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왕비의 정부였던 '마누엘 고도이' 총리의 막강한 실세의 힘이 아니었나 한다.
그리고 고야는 죽을 때까지 그림 속 모델을 말하지 않아 많은 이들이 그 모델을 궁금해 하고 있다.
스페인은 지나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다.
따라서 ‘예술의 자유!’ 운운하며 여인의 나체를 함부로 그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수모를 받기 일쑤였고, 심지어 국외로 추방되거나 사형까지도 당했다.
유럽 각 지역에서 신화를 빌미로 한 여인의 누드, 예컨대 알몸의 비너스가 판을 치는 동안
스페인에서 만큼은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정도만 간신히 ‘누드화’의 한 칸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나마 벨라스케스의 비너스는 등만 내밀고 있는 정도이다.
기존의 누드화 들은 대부분 신화 속 존재들을 그리고 있다.
물론 종교화에서도 누드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긴 하지만,
대부분 ‘이야기 전개상’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드물게 실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그림도 발견되지만,
대체로 화가가 자신의 연인을 담아 개인적으로 보관한 것이거나 습작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멋쟁이 여자 한량 ‘마하’가
그야말로 별 이야깃 거리 없이 나체로 누워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게다가 비너스 등 여성 누드화의 단골들은 인간이 아닌
상상 속의 인물(여신)들로 9등신, 8등신 등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타고 그려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화가들은 그 모델을 완벽한 비율의 과거 조각상에서 찾았으며
체모는 당연히 그리지 않았다.
이는 여성의 머리카락 마저 남성들의 경건한 마음을 들쑤신다고 여기던 옛사람들에게
차마 체모를 드러내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체모는 여인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흠으로 보이기도 했다.
고야는 그 금기들을 뛰어넘었다.
여신도 아니고 완벽한 비율의 조각 같은 몸도 아닌 ‘그냥 진짜 여자 마하!! '
게다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는 ‘도발적인 시선’.
옷을 벗은 마하는 제대로 말하자면 ‘nude(고상하고 이상적인 신체로서의 몸)’라기 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알몸, 즉 ‘naked’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의 주문자는 카를로스 4세 시절 왕비의 애인이자 왕을 대신해 나랏일을 쥐락펴락하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였다.
고야가 발가벗은 여자의 몸을 그리면서도 종교 재판소의 매 같은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문자의 ‘권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도이는 고야에게 같은 여인을 옷을 입은 모습으로도 그리도록 했다.
짐작컨대, 고도이는 뭘 좀 아시는 분들에겐 〈옷을 벗은 마하〉를,
화들짝 놀라거나 욱하고 호통칠 만한 꽉 막히신 분들에겐 〈옷을 입은 마하〉를 보여줄 작정이었던 것 같다.
무능력 했던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가 쫓겨 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도이가 소장했던 작품들이 대거 수집되는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이 작품들을 비롯해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함께 있었다.
고야는 뒤늦게 〈옷을 벗은 마하〉로 인해 종교재판소의 호출을 받게 된다.
다행히도 고야는 페르난도 7세의 신임을 받던 화가였기에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한편, 고야의 이 그림이 대체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은
최근까지도 사람들의 수다용 먹잇감이 되고 있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가 바로 알바하는 공작부인이다.
고야는 스페인 실세 가문 알바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왕비보다 더 직함이 많을 정도로 지체 높은 알바 공작부인은 남편이 죽자
마드리드를 떠나 남부 안달루시아의 별장으로 갔는데, 고야도 그녀를 따라가 몇 달을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고야는 마하 복장 차림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에 새긴 글자
‘오직 고야(Solo Goya)’를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비롯해 그녀의 초상화를 자주 화폭에 담았다.
이 때문에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러나 둘의 신분 차이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고야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거나
설사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해도
고야는 알바 부인 정도의 권력자가 거느릴 수 있는 ‘심심풀이 정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거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의 모델을 알바 공작부인이라고 단정하지만
정작 알바 공작의 후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공작부인의 유해까지 파내는 소동을 벌였다.
뜻밖에도 유해 검시관들이 그림 모델이 알바 공작부인과 비슷하다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또 한 차례 격론이 이어지기도 했다.
사실 고야가 그림을 그릴 때 공작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게다가 이 그림들이 재상 고도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라면
고도이의 집안과 정치적 숙적 관계에 놓여 있었던 알바 집안 여자를 고야가 굳이 모델로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모델은 고도이의 또 다른 연인 페피타 투도라는 여성이라는 소문도 있다.
어쨌거나 현재 이 두 작품은 나란히 전시실 벽에 걸려 있어서 “저 옷을 벗으면 어떤 속살이 펼쳐질까?”를
상상하는 관람자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후련하게 해소해주고 있다.
따라서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회화사에서 상당히 특별한 모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누드는 비단 스페인뿐 아니라 서양 회화사에서도 보기 드문 ‘노골성’이 있다.
서양 누드 속 여자들은 자신을 바라보게 될 남성 감상자들이 느낄 ‘민망함’을 배려해 늘 시선을 돌리고 있기 마련이다.
〈옷을 벗은 마하〉의 이런 뻔뻔한 시선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을 뿐,
아예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마치 작정하고 다 보여주는 노골적인 누드는 고야가 살던 시대만 해도 찾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티치아노의 누드는 사람의 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여신의 몸을 그린 것이라는 핑계라도 있어 도덕적 검열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1599 - 1660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 ‘시녀들’은 왕의 딸인 어린 공주 마르가리타를 돌보는 시녀들이란 뜻이지만,
본래의 제목은 ‘왕족’이었다. 왕의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유럽 회화사에서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한 구성으로 그렸다.
벨라스케스는 어느 한 순간을 마치 사진처럼 정밀하게 포착해 내려 했다.
그림의 앞쪽과 중간에 일곱 명의 인물(하녀들, 사프론, 경호원, 난쟁이 등)을 배치했다.
이 방에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어서 인물들이 놀란 듯한 순간을 포착했다.
벨라스케스 자신은 화면 안에서 거대한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왜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지에 대한 답은
그림에서 뒤 벽면에 걸려 있는 거울에 있다.
거울에는 이 방으로 들어오는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부 미술사가는 거울이 아니고 초상화라는 주장도 있지만, 거의가 거울로 보고 있다.)
결국 이 그림의 구성은 크게 그려진 화가 자신이라든지,
왕이라는 어마어마한 신분을 거울 속에 가두듯이 흐릿하게 그렸다 든지 하여
관찰하고 관찰당하는 자의 위치를 묘하게 비틀어 놓았다.
더 나아가서 화가, 모델, 감상자의 상호 관계가 비틀어져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시각적인 정밀함과 고도로 복잡한 구성, 섬세한 붓놀림, 극적인 빛의 움직임과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가 한데 어울려 있다.
이 작품이 완성된 지 반세기도 되지 않아서 이탈리아 화가 루카 조르다노는 ‘회화의 신학’이라고 칭찬했다.
이 그림은시대를 막론하고 화가들은 찬탄했다.
고야, 드가, 마네, 피카소, 달리와, 최근의 팝 아트 화가 리처드 해밀턴이
자신들의 작품 활동에 이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눈에 비치는 순간적인 영상을 그림이라는 형태로 재현하는 것이 화가의 숙제였다.
시각적인 공간감은 말할 것도 없고, 지적으로도 층을 이루는 공간 구성은 놀랄 만큼 정교하다.
이 그림이 다층 구조를 가지므로 작품은 더욱 심오한 깊이를 가진다.
그림감상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인물 배치를 보자.
왼쪽에는 약간 뒤편에 화가 자신의 모습을 크게 그렸다.
다음에는 시녀 중에 가장 어린 사르미엔토가 있고,
천사 같은 마르가리타 마리아 공주가 가운데에 밝은 빛을 받으면서 배치되어 있다.
계속해서 벨라스코 시녀와 연속하여 두 명의 난장이가 있다.
이 중에 한명은 앞쪽에 얌전히 앉아 있는 개를 걷어차고 있다.
앞줄에 배치된 어린이들의 뒤에 방의 안쪽으로 공주의 샤프론(사교계의 미혼 여성을 따라 다니면서 돌봐 주는 부인)과
경호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떤 읽기에서 이렇게 쓴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 자세가 너무 다정하게 보여서 서로 연애를 하는 사이가 아닌가? 하는.
저 뒤쪽에 열린 문 앞에 옆 모습으로 서 있는 궁정 시종장이 그림의 깊이를 깊숙하게 해준다.
벽에 그림이 걸려 있어서 마치 이 세계가 다른 세계에 비춰 보이는 듯하다.
뒤편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다.
거울에는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가 비춰있다.
이 광경이 이 그림의 전부를 설명해준다.
그림 속의 인물이 무엇 때문에 정물화나 사진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지는 모른다.
벨라스케스가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든지, 아니든지 관계 없이 왕과 왕비가 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다.
거울이 아니고 벽에 걸린 그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관람자에게 많은 읽기를 제공한다.
선물화가들이 이 작품에 매료되는 이유는 회화의 기본적인 문제와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화가가 인지한 어떤 영상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관람자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을 통해서 관람자를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보여 주었다.
김신웅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그림은 화가들이 선정한 최고의 그림에 2번이나 선정되었었다 하였으며
(1985년 미국의 평론가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 작품으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작품을 선정했었다)
우리 일행들은 이 프라도 미술관의 관람시간이 달랑 1시간여 뿐이었는데
이 작품 하나에만 20여분 넘게 소요되었다.
마침 관람자들이 많지 않아 매우 여유있게 이 작품에 대한 김신웅 과장의 설명을 들었었다.
아래 사진으로는 색채의 질감이 잘 표현되고 있지 않은데 실제로 본 그림 색채감은 실물과 같아도 너무 같았다.
예를 들면 맨 아래 개의 경우 그 털이 마치 살아 있는 개처럼 반들거리고 윤기가 뿜어져 나올 정도로
그림 속에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와 서는 '멍~~ 멍!!' 소리를 낼 것만 같아 보였으니
나머지 부분에 대한 설명은 아니 해도 될 법 하겠다.
벨라스케스 가슴의 십자가 : 벨라스케스의 가슴에 십자가가 표현되어 있는 바
저 십자가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으로 당초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에는 없었다.
그런데 벨라스케스는 본인이 이 그림을 그린 후 2년 뒤인 1658년 30년 넘게 궁정화가로 일한 공로를 인정 받아
당시 황제였던 펠리페 4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게 되고, 작위를 받은 후 십자가를 본인이 직접 추가해서 그려 넣었다 한다.
그림 상층부 : 가까이에서는 보이지 않고 그냥 시커면 여백이었으나
김신웅 가이드에 이끌려 뒤로 약 3 ~ 4m 정도 물러나 바라보자
천정을 비롯한 나머지 부분이 시야에 들어오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시각적인 공간감이 틀려 지는 현상으로 일행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었었다.
빨간 꽃병(??) : 마르가리타 마리아 공주의 손에는 용도를 알수 없는 빨간 병을 들고 있는데,
저 당시 여인들의 미적 기준으로 얼굴이 하얘야 했으며,
얼굴을 하얗게 만들기 위하여 납을 마시기도 했었다 하였다 하니
저 병에 납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여인들의 고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림설명 2
1985년 미국의 평론가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 작품으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작품을 선정했습니다.
이 그림은 스페인의 궁정 화가인 벨라스케스가 마르가리타 공주와 주변 인물들을 마치 스냅사진 찍듯이 그린
집단 초상화입니다.
여기에는 총 11명이 등장을 하는데요.
먼저 가운데 마르가리타 공주가 있고요 양쪽에 두 명의 시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난장의 두 명. 그리고 시종으로 보이는 두 명이 또 있습니다.
맨 뒤에는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벨라스케스 화가가 자신을 그러 녛었습니다. 지금까지 총 9명입니다.
거울 속에 두 사람이 더 있습니다.
왕과 왕비입니다. 이렇게 해서 총 11명이 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구도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명은
화가 벨라스케스가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는데 공주와 시녀들이 놀러 온 상황이라는 겁니다.
공주가 왕과 왕비를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녀들이 공주를 달래고 있는 중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이 그림에는 두 개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주와 시녀들이 있는 공간과 그 앞에 왕과 왕비가 있는 공간입니다.
보통의 그림은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서 여러 기교들을 부리지만 그래봤자 그림 속의 입체감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거울을 배치함으로써 그림의 앞쪽까지 공간을 확대해 버린 겁니다.
(출처 : 위대한 미술 작품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 해석 및 설명 : 선물
<엘 그레고> 1541 - 1614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의 초상
* 엘 그레코, 성령 강림, 1600년경, 275*127cm,
벨라스케스, 고야와 함께 스페인이 자랑하는 3대 화가 중 하나인
엘 그레코(El Greco)가 성령이 강림하시는 사건을 그렸다.
주님을 사랑하던 이들이 함께 모였다. 그들은 모여서 주님을 회상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교회의 본질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몇 여성들과 함께 사도들이 모여 기도할 때, 하늘에서 성령이 임재하셨다.
갈라진 불꽃 모양의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내렸다.
깜짝 놀라 손을 들거나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들…,
화면 전반부를 이루는 두 사람은 너무 놀라 뒤로 넘어지려 한다.
성령 강림은 충격이며 놀라운 사건이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성령강림을 통해 반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더 이상 다락방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다.
성령이 임재하자 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목청껏 소리쳤다.
그것 때문에 손해를 보고 감옥에 간다할지라도 외치고 증언했다.
화가는 정면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인물에 자화상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 역사적 현장의 증언에 동참하고 있다.
<그 밖의 작품들 몇점>
* 귀도 레니의 클레오 파트라(1640)
*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634, 1635)
*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 1.
* 후안 바우티스타 마이노 2.
* 비비아노 코다치
▼ 보관중인 3만여점 중 3천여점만을 전시하고 있다는 프라도 미술관 관람을
우리는 달랑 한 시간여 만에 해 치우게 되었다.
과연 대한민국 사람 본질인 빨리 빨리가 여기서도 성립이 된 것이다.
고야의 마하를 만나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에 감탄한 것으로 그 1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었다.
비록 턱 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과거 빈에서 굴림트의 키스나,
뭉크의 절규에서는 느끼지 못했었던 감동을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 프라도 미술관 앞에 있는 '산 헤로니모 엘 레알(San Jerónimo el Real)" 성당 앞에서 전용버스에 오른다.
▼ 이제 사진놀이도 끝나 간다. 모든 것이 이별을 위한 준비가 되겠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공항으로 이동하는 전용버스 내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드리드를 담아 본다.
▼ 마드리드의 관문인 '바라하스 국제공항(Aeropuerto Adolfo Suárez Madrid-Barajas)' 공항까지는
채 20분이 소요되지 않았으니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이처럼 시내 중심가 가까이에 공항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게 다가 왔었다.
우리의 인천공항은 좀 멀어 보인다.
▼ 관광버스 운전기사로 모범답안처럼 손님들에게 대해 주었던 포르투말 출신 '미호'와도 안녕을 고한다.
나와 굳은 이별의 악수를 나눈 후 엄지 척을 해주는 그의 미소가 그립다.
▼ 우리는 올때와 반대로 마드리드에서 출발하여 7시간 정도의 운항을 통해 두바이로 돌아 간후
두바이에서 약 3시간 정도를 대기후 인천행 비행기로 갈아 타야 하는 일정을 보내야 했다.
현지의 로칼 가이드는 통상 공항까지 나오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우리 김신웅 과장은
그 관례를 무시하고 우리를 배웅해 주러 이곳까지 함께 했었다.
김과장의 친절함에도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는 안 델꼬 간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까지 우리의 안전귀가를 위하여 열심히 설명해 주는 김과장의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확인해 보고 싶은 대목이다.
▼ 입출국 수속시에는 괜시리 정신이 없다.
아마도 철저한 항공사측의 관리 때문인가 하는데 그 와중에 잠시 여유가 있어
마드리드의 관문인 '바라하스(Aeropuerto Adolfo Suárez Madrid-Barajas)' 국제공항을 관찰해 보았다.
▼ 그리고 이 공항에서 점심을 해결해야 했었다.
▼ 메뉴는 현지에서 구입한 김밥으로 그 가격이 한화로 2만원이 넘는다 했는데
이 김밥은 윤성란 가이드의 배려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해외에서 만든 김밥이라 해서 '머 그러쿠 그러겠지 모' 했었는데 막상 이 녀석을 먹어 보니 '깜놀'이었다.
우선 재료부터 국내의 그것들과도 차이가 있었을 터인데 내가 접했던 김밥중 최고의 김밥 맛이었다.
대한민국 김밥집들은 반성을 많이 해야 할 대목이고,
난 김밥을 별로라 하여 잘 먹지 않는 편인데 이런 김밥이라면 매일이라도 먹어 줄 수 있을 정도의 김밥이었다.
그런데 맛나는 건 항시 그 양이 적은 것이 문제였다.
하나만 더 주지!!!
김밥 양을 줄이기 위한 포장의 기술이 돋보이는 김밥 도시락 모양이다.
▼ 마드리드 공항 한 귀퉁이에 털부덕 주저 않아 그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 게이트로 이동을 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게이트는 지하에 있었나 보다.
▼ 마드리드 공항 계류장의 모습을 바라 보며 보딩 타임을 기다린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지루한 시간중에 하나인 것이겠다.
▼ 예정된 시간을 30여분 정도 지체하여 마드리드 공항을 떠난다. 더불어 스페인 왕국과 이별을 한다.
그런데 창가에 않아 있는 서양녀와 그 옆자리 가운데 않아 있는 아내와 작은 다툼이 벌어졌었다.
아내가 작은 가방을 발밑에 두었더니 그 서양녀 왈 '그건 아니잖아 위 선반위에 올려야지!!'
가만히 당할 두여사가 아니지. 절대 아니지!!
본디 이코노믹석은 앞자리 좌석 밑에 작은 가방등을 보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으니
결국 그 서양녀가 승무원까지 호출하여 심판을 청한 결과 그녀의 KO패로 승부는 결정났었다.
잠시 후 상황은 완전 역전된다.
아~~ 글쎄 그 서양녀가 계속 기침을 해대는 것 아닌가??
이제 울 마님의 역공이 시작되는 판이다. "너 감기??" "코로나 19??"
알레르기가 심하다나 어쩐다나??
계속 다그친다!!
조금전의 복수혈전이 벌어 지는데 내 얼굴에서는 시일실 웃음이 퍼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뒷좌석을 제외하고 앞, 옆자리 모두 젖먹이 혹은 이제 간신히 젖띤 아해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아해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바로 그 옆 자리에 않은 현정의 표정은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이었다.
내 앞의 꼬마 녀석 어깨를 툭툭치고는 '조용히!~~!'
해 본들 그게 먹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참말로 난감한 7시간의 비행이 시작 되었다.
▼ 해외 여행시 갈때와 올때가 차이나는 것은 바로 이 기내식이다.
갈 때는 그런데로 먹을 만 한데 귀국시의 기내식은 어쩜 그리 하나 같이 별루냐 그래??
그래. 그래!!
그냥 공짜 술이나 마시자~~~!!
▼ 식사 후 비행기 내부는 암전수준이다.
그런데 요 "EK142 " 편 비행기는 A380 기종 중에서도 최신형으로 보인다.
올때 비행기에 비하여 인테리어에 차이가 많았는데
천정에는 마치 밤하늘을 연상시키듯 별자리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 여행에 지친 몸이기에 와인 몇 잔 하고 푸욱 잤었다 보다.
모니터는 어느새 두바이에 근접하고 있는 항적을 보여 준다.
▼ 7시간여의 비행을 마치고 '두바이'에 다시 돌아 왔다.
아~~ 대기 시간 3시간을 또 어찌 보낸다냐??
▼ 야~~ 요 뱅기 싱기하네??
마치 자동차 기어 후진 넣으면 모니터에 뒤가 보이듯
우리가 착륙하여 계류장을 이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모니터로 중계되고 있는 것 아닌가??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중계방송이 되겠다.
▼ 그 싱기한 비행기 내부모습을 한번더!!
A380 아주 조아여!! 좌석도 넓고...
이것이 갖은 자들의 여유가 아닌가 하였다.
▼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여 내가 이용해야 할 게이트 위치를 확인하고,
이리 조리, 조리 요리 아이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죽였었었다.
한번 경험이 있었던 곳이기에 어렵지 않게 흡연실로 찾아 들어 갈 수 있었다.
▼ 두바이 공항의 흡연실은 내가 경험했던 어떤 곳보다도 럭셔리 하였다.
이건 무슨 카페 수준 아니던가??
▼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3시간을 12시간 처럼 기다린다~~
▼ 이제 또 한번 8시간 가까이 비행을 통해 귀국길에 올라야 시간이다.
▼ 인천행 비행기에서는 알라들이 울던, 싸우던 승무원에게
식사로 나온 죽 한그릇과 와인을 청하여 마시고 떡실신 하듯 잠에 빠져 버렸었다.
▼ 한참 자고 있었는데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여 눈을 뜨게 된다.
비몽사몽간에 '치킨'을 선택하였는데 이런 제길~~~
먼늠의 닭고기 비린내가 이리 나는 건지 도저히 먹지 못할 냄새였기에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말게 된다.
배는 고픈데~~~
▼ 기내식 한번 더!!
요번에 오믈렛이다.
그냥 그냥 허기만 면하기 용으로 배를 채운다.
귀국행 비행기의 기내식은 언제나 이런식 이다.
▼ 식사후 몸을 풀겸 뒤로 가 보았더니
'오호라!!??'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지 않은가??
언제고 하늘의 궁전이라는 이 A380 기종에 대한 재원 등을 알아 보아야 할 호기심이 또 발동한다.
▼ 항적으로 보아하니 짱꼴라 땅을 지나 우리의 서해를 통과하고 있다.
여기서 한번 더 먹거리를 내어 준다.
그리고 스페인 - 포르투칼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된다.
▼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아무리 좋은 관광지를 다녀봐도 우리 집이 우리 대한민국이 최고다!!
▼ 그리고 이것은 이번 여행의 전리품(??)이 되겠다.
무슨 전리품인지 아는 사람은 알 수 있겠는데 혹자들은 흉보지 않을까 싶지만
그냥 장난으로 치부했으면 감사한 대목이다.
더불어 이번 여행에 함께 해준 한근 부녀
특히, 꼰대들과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즐겨 주었던 현정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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