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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포르투칼

24. 스페인/포르투칼 제 6 일차(2022년 07월 06일, 수요일) 4. 신트라 탐방후 파티마로 이동

 스페인/포르투칼 제 6 일차(2022년 07월 06일, 수요일)

4. 신트라(Sintra) 탐방후 파티마 Hotel Snata Maria 입실

 

 

76일 전체일정 1. 리스본(Lisbon) 이동후 중식 바깔라우(iEmpty Parasendif baccala)

                             2. 툭툭이 투어 전망대(Miradour da Senhora do Monte)

                             3. 벨렘탑(Torre de Belém)과 제로니모스 수도원(Jerõnimos monastery) 외관 탐방

                             4. 신트라(Sintra) 탐방후 파티마 Hotel Snata Maria 입실

 

                             5. 파티마 성당(FATIMA Basilica) 주간 탐방

                             6. 파티마 성당(FATIMA Basilica) 야간 미사

 

 

신트라 - Sintra(왕실의 별장으로 사용됐던 '신트라 궁전)

신트라 역사 : 신트라는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무어성(Mouros 이스람 모로코인 城)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유물

그리고 BC5세기에서 장식도자기와 세석기(microlithic)시대 부싯돌기구를 포함하여

신트라 산에서 많은 말있는 금석 병영시대(chalcolithic)의 꽃병을 포함한 도자기 조각들이 발견 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의 흔적도 몬테에서 레노 도시와 함께 신트라 산맥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BC9-6세기 때 늦은 청동기 시대의 유명한 신트라 칼라 유물은

1900년 이후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철기시대까지 의미가 있는 고고학 가치가 있는 신트라는

살기 좋은 비옥한 토양 기후 다구스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2세기 중반 로마가 점령을 시작하던 즈음 오리시포(Oli ssipo 현재의 리스본)는 로마 영방(領邦) 일부였다.

지역 거주민 들은 로마의 생활방식을 열정적으로 받아 들여

지금의 신트라 도시지역에도 로마인들이 정착하여 살았다.

또한 고고 유물들은 로마와 비잔틴시대 후반에

신트라 지역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무역거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신트라 정착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에는 그곳이 무어인 정복 시대부터 리스본에 종속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곳은 1093년 레온(Leon)의 알폰수6세(AlfonsoⅥ)에 의해 처음으로 해방되었지만

2년후 무어인에게 다시 재점령 당했다.

 

 1181년 탬플기사단의 탄압후 아폰수 앤히케스는

탬플기사단이 소유한던 포르투칼의 토지를 그리스도 기사단에게 넘겼다.

1383년부터 1385년까지 위기싱황때 신트라는 중안에게 마지막으로 항복한다.

그 결과 다니스 왕이 그곳을 강탈해 여왕의 궁전으로 사용하였다.

 

아폰수는 16세기 후반까지 그곳을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쓰려고 위풍당당하게 왕궁을 세웠다.

15세기 후반의 신트라는 완벽한 왕자(Pertfect prince) 주앙의 미망인이며

포르투칼에서 가장 위대한 여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오노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

러나 도시가 확실하게 왕과 연결된 것은 마누엘 1세의 보호 아래에 있을 때였다.

 

왕궁을 대폭 확장했으며 역사적인 항해에서 귀환하는 바스쿠다가마를 지켜본뒤

페냐의 성모마리아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전언에 의하면 세바스티앙 왕은 이곳에서 시인 카이스몽이 읽어 주는 서사시를 듣곧 했다 한다.

 

19세기 페냐 궁전은 언덕과 숲의 멋진 전망과 함께 마을 높이 앉아 있다.

페냐궁전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었고, 오페라의 모양을 가지고 자신의 로얄피를 달라는 왕의 의지에 의해 지어졌다.

벽의 장식과 탑 등 궁전은 신화 속의 생물의 동상들이 아름답고 선명한 파스텔 색상으로 칠해져 있다.

여왕 아멜리아는 망명하기 전 페냐 궁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다.

 

이런 신트라를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하였다.

특히 신트라를 찬미했던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장편서사시 “차일드 해롤드의 편력(Childe Harold′s Pligimage)”에서

이곳 신트라를 예찬하면서“위대한 에덴”이라고 하였다.

그의 칭송대로 로마시대 유적 유럽 특유의 아기자기하게 꾸민 상점들 앞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것은 여행의 참맛이다.

 

시인 알폰소 로페스비에이라는

신트라가 자연의 경의로운 손이 창조해낸 가장 사랑스럽다며

유럽의 어느 도시도 비견되지 않는다 칭송하였고,

낭만주의 영국의 시인 로버트 사우디 (Robert Southey)는

지구상 사람이 살고 잇는 땅 중에서 가장 축복받은 아름다운 곳이라 극찬하였다 한다.

 

<리스본에서  신트라 이동경로>

이동거리 : 24km
이동시간 : 34분

  ▼ 리스본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채 저녘식사 시간도 되지 않아 이별을 해야 하는 일정이다.

신트라를 거쳐 파티마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에그타르트의 단맛이 입가에서 지워지기도 전에

전용버스에 탑승하였다.

그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제로니모스 수도원을 바라보며 에어컨 냉기로 덥혀진 몸의 열기를 식히게 된다.

 

  ▼ 잠깐 졸 시간도 없이 이내 신트라에 도착하는데 여기서는 가이드의 도움 없이 각자 알아서 자유시간을 갖게 된다.

전용버스에서 광장언저리에서 하차 하여 한바퀴 둘러 보는데 

신트라는 옛 궁전이 있다 하였으나 그 규모가 실로 손바닥만 하여 의외 였었다.

  ▼ 광장 인근의 카페에는 예의 탐방객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고 길 건너편으로 궁전이 바라다 보인다.

  ▼ 궁전의 규모는 궁전이란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아담하게 보인다.

  ▼ 어디로 가야 하나하면서 우선 신트라 궁전을 중심으로 주위를 한바퀴 둘러 본후에,

    김신웅 과장이 손짓하며 알려 주는 골목길에는 무수한 인파가 몰려 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아내와 나도 그 인파속에 합류하게 된다.

골목길은 좌우로 빽곡히 기념품 가계가 영업중인데 제법 가파르다고 느낄 정도로 언덕길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 상점들을 훓어 보며 다른 이들 뒤를 쫓아 골목길을 누비게 된다.

   그 골목길 뒤 산자락에는 사연을 알수 없는 깃발이 펄럭이는 성이 보이는데 '무어인의 성채'라 한다.

그 성채를 바짝 끌어 당겨 잡아 보았는데 시간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필경 저곳도 가 보겠지 하며 입맛만 다시게 된다.

   이 골목길 바닥은 모자이크 타일로 조성되어 있고, 빛 바랜 벽화가 나의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 골목길을 서성이다가 공예품 매장에 한번 들어가 보았다.

그 많은 상점중에 딱 한번 들어 가 본 것인데~~~

여기서 쎄라믹으로 만들어진 닭을 만나게 된다. 

  ▼ 아래 사진에 보이는 닭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가 길어 지는데 서양 사람들에게 닭의 표상은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하고,

그에 따른 참회 때 닭이 3번 울었다는 데서 비롯 하였다 하는 설이 있으나

그 이야기는 아래 내용에서 와전된 것이라는 김신웅 과장의 설명이 있었다.

 

김과장에게 설명 들은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면,

어떤 순례자(이름을 기억하지 못함)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 민가에 들어가 하루 숙박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집에는 부모님은 모두 외출하고 딸 한 명만 있었다.

그런데  그 딸이 여행자를 유혹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딸이 자기의 부모에게 거짓을 고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난 여행자를 민가의 부모와 딸이 도둑으로 몰아 고발하게 되어 여행자는 구속이 되었다.

구속된 여행자는 판사에게 

"내가 진실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그 증명은 관리인 저녘 밥상에 있는 요리된 닭이 내일 아침에 3번 울 것이다"

"그러니 내일 아침을 지난 후에 나를 벌하라"고 요청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다음날 아침 요리된 닭이 3번 울게 되어 본인의 무죄를 증명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닭은 행운의 표상외 된 것이라 한다.

 

위 전설의 내용인즉슨 이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으로 결말이 맺어 지는 것으로

 그래서 유럽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하여 행운의 닭을 선물로 주고 받는 전통이 생기게 되었단다.  

 

 

 

  ▼  상점가를 벗어 나자 이제는 내리막 길이 나타난다.

아래 사진처럼 매우 좁은 골목길의 연속이다.

  ▼  광장쪽 큰길로 나와 신트라 궁전을 만나 보기로 하는데 이 주변도 온통 많은 매장들이 영업중이었다.

  ▼ 도로를 건너면서 좀전에 다녔던 상가 골목길 입구를 배경으로 인증을 한후에,

  ▼  정면에 보이는 신트라 궁전으로 올라서듯 다가 가게 된다.

  ▼  헐....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시간이 될까??

뭔가 볼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하면서 호기심이 일지만 이놈의 시간문제로 인하여 후퇴하고 말게 된다.

  ▼  궁전 앞에서 무어인의 성채가 더 확실하게 바라다 보인다.

무어인(Moors)라는 용어는 이슬람계인으로서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지금의 모로크 인근)에

살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 왔으며, 그들은 아랍계나 베르베르족의 후손들이다.

지금 보이는 저 성채도 그들이 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시절 조성된 성채인 것이고,

며칠 전 다녀 왔던 알함브라 궁전도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포르투칼이나 스페인의 이슬람계인들은 무어인들의 흔적을 닮아 있어,

보통의 백인 유럽인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아시아계의 얼굴 모양도 또 오르게 한다.

  ▼ 신트라 궁전 본관에서 후퇴하여 뒷쪽으로 가는 출입구를 확인하여 궁전 뒷편으로 가게 된다.

    그럴듯한 사자상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었고,

    무어인들의 성채가 한층 가깝게 바라다 보이는데 그 궁전 후원(??)에서 이리저리 호기심을 해결해 본다.

   그걸 끝으로 신트라 궁전 탐방을 마치고 집합장소로 이동을 한다.

    집합시간까지는 아직인지라 노천까페 빈 테이블에 무임승차 하여 다리 쉼을 잠시 해 본다.

    담벼락 한귀퉁이에 숨어 있듯 있는 신트라 우물을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물을 담고 있는 물받이 색이 영롱하고, 깔끔하게 잡히는데 알함브라 궁전에서 만났던 타일을 연상시킨다.

 

여행객을 실은 마차가 다니고 담장에 핀 꽃들이 그림 동화처럼 펼쳐지는 곳!!  

궁전이라 부르기에는 그 규모가 아담하여 더 마음에 들었던 궁전의 모습!!

마을을 내려다 보듯 위압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무어인들의 성채!!

무늬를 입힌 타일바닥으로 조성된 골목길을 점령한 무수한 상점들!!

그런 모습들에서 이곳 신트라를 수 많은 예술가이 찬양 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