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710m
1800년 무렵 박생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 龍門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신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이다.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 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한다. 현재 전국 3만여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국수봉] 763m
정상은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의 경계를 이루며 큰재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 상에 솟은 산이다.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菊水)라 한 듯 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 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 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상주, 문경, 김천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된다.
▶ 掬水(움켜쥘 국)와 菊水(국화 국)가 정상에는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나, 의미상 정상석의 국수(掬水)가 맞는 듯함.
[큰재] 320m
해발 300m가 겨우 되는 영동군 모동면에서 상주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이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폐교(옥산 초등학교 인성분교) 와 민가(박분례 할머니 2008년 작고하시고 폐가로 남아 있음) 한 채가 마주보고 있다.
상주시 모동면과 공성면을 이어주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기점이자 옛날 상주에서 한양으로 가다보면 근방에서 이곳이 "가장 큰 고개
옥산 초등학교 인성분교.
1949.11월 개교하여 597명의 학생을 배출하고 97.3월 폐교되었다는 내용이 잠겨진 교문 안쪽에 교적비에 새겨있고 교문 바깥쪽에는 '부산녹색연합 생태학교 백두대간교육센터' 라는 간판과 안내문이 있고 교문은 자물쇠를 채워 놨다. 그러나 온통 잡풀만 무성할 뿐 어떠한 생태학교의 흔적도 없다. 현재 학교는 모두 헐리고 새로이 개발 중 이다.
[회룡재] 340m
마을 뒤의 회룡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마치 용이 뒤돌아보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回龍 재라고 한다.
[개터재] 380m
민초들에게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한 날짐승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개터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산세가 마치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부근의 봉산마을, 효곡마을, 왕실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 해서 봉산재, 효곡재, 왕실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윗왕실재] 400m
산세가 왕이 기거하는 왕궁과 같다 하여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함부로 왕을 입에 올리지 못하던 시절이라 뒤에 ‘실’자를 붙여 왕실재가 되었다 한다.
[백학산] 615m
물 좋고 공기 맑던 이 산 주에 백학(白鶴)이 날아와 앉는 모습이 마치 설산처럼 하얗다 하여(산을 하얗게 덮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그모습이 사라진지 오래...
[개머리재]소정재 290m
모서면 소정동과 대표동(일명 함박골)을 잇는 도로로, 개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소정재라고도 부른다. 소정동은 산 중복에 위치하여 식수를 길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우물을 길어 올린다는 뜻의 소정(召井), 대표(大杓)동은 이곳 지세가 북두칠성의 자루인 두 병이 능히 될 수 있다는 뜻에서 부른 것이라 한다.
[지기재] 260m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 하여 적기(賊起)재 라고 하였으나, 지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다시 지기재로 부르고 있다 한다. 일설에는 적기의 사투리가 지기로 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아마도 모서면에서 내서면으로 가는 외길이어서 그러한지도 모른다.
[신의터재] 280m
"때는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대마도를 출발한 왜군이 14일에 부산진성을, 15일에 동래성을, 19일엔 언양성을, 22일에는 영천성을 함락하며 물밀듯이 밀려든다.
이에 불똥이 떨어진 조정은 유성룡, 신립, 이일을 보내어 백두대간의 조령, 죽령, 추풍령에 방어선을 치고 저항한다.
바로 그 때, 상주 화동면의 김준신이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나라를 위해 죽을 자는 나를 따르라.”하고
신의터재에서 의병을 모으니 그 지원자가 무려 600여명에 이른다.
4월 25일 관군 60여명과 600여명의 의병대로 전열을 갖추고 상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군 17,000명과 싸웠으나 무기도 시원찮은 의병대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싸우고 또 싸우고.. 그렇게 하여 김준신 장군은 이 곳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왜군은 이곳에서 이기긴 하였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자 그 화풀이로 김준신 가족이 살고 있는 윤지미산 아래 판곡리로 몰려가 대학살을 시작했으며 부녀자들은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마을에 있던 깊은 연못(낙화담)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은현’ 이라 불리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준신(金俊臣)이 이곳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이 되어 상주진에서 많은 왜군을 도륙하고 임란 4월 25일 장렬하게 순절한 후부터 이곳을 신의터재라 불리었다.
왜군들이 김준신 의장의 고향인 화동면 판곡리를 찾아 김씨 일문을 멸하려 하자, 부녀자들이 몸을 던진 곳이 낙화담이라 한다.
이곳에는 고 이은상 선생의 비가 있다.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나네..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의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일제때 민족정기를 말살한다고 “어산재”로 개명되었고 문민정부 수립후 광복5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를 되찿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저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친 것은 1996년이 었다. 화동면 주민들은 화동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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