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백두대간이야기

[스크랩] 봉화산, 백운산구간

[복성이재] 550m

 

기인 변도탄이 天氣를 보니 삼년내에 국가에 큰 전란을 예시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 하여 삭탈관직을 당하고 전란을 대비,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북두칠성 중에 복성이 남쪽으로 비처 별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하는데 복성별빛이 멈추는 지라, 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움막을 지었다 하여 복성이재로 유래되었다 함.

 

[치재]

짖재마을의 서쪽 언덕 위에 있는 고개이며, 흔히 이용하는 교통로는 아니나 동쪽 가까이에 임도가 올라와 있다. 이 지역은 각종 버섯류와 산과일, 산채나물, 고랭지채소 등을 많이 생산하는 지역으로 주로 대간의 동쪽 사면에서 이루어진다. 봄철에는 진달래 관광객들로 人山人海 를 이룬다. 고개라는 뜻의 ‘峙’와 ‘재’가 합쳐져 지명이 되었다. 치재에 서면 흥부마을로 유명한 아영리 성리마을도 내려다보인다. 이 마을에는 판소리에 나오는 화초장 바윗거리, 흰죽배미, 노리다리 등의 지명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

 

 

[봉화산]919.8m

 

봉화산(919.8m)은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남해 바다에 이르기 전 장중하게 꿈틀대며 솟아오른 곳에 위치해 있다. 고적조사자료(古蹟調査資料)에 따르면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 주(周) 140 간(間) 석축(石築) 남원 함양 계(界)"라 하여 곧 봉수대는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에 있고 봉수대의 둘래 약 140칸(약252m)이 되는데 돌로 쌓은 것으로 남원과 함양 간의 경계선에 있다. 이 봉수대는 대체로 통일신라이후부터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이 잦았던 운봉과 아영면 부근에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봉화산은 위 기록에서와 같이 봉화산은 전에는 장안산으로 불리워졌고 봉화, 봉수대가 봉화산으로 불리운 것이 확실하다. 지금은 다만 봉화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1km 정도 가면 도착하는 무명봉에서 ‘봉화산 봉화대’라는 팻말로 옛 자취를 짐작해 볼 뿐이다. 봉화산은 비록 이름만 남았지만, 대신 5월이면 철쭉 군락이 봉수대에 횃불이 타오르는 듯이 펼쳐진다.

 

◆[광대치]

 

장수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지지리계곡과 함양군 대안리를 나누는 고갯길이다. 광대치 쉼터에서 대안리 대상동으로 내려서는 길이 갈라진다. 봉화산을 뒤에두고 만나는 870봉에서 대간은 경상남도와 헤어져 전라북도 땅으로 진행한다. 다시 경상도를 만나는 것은 지리산 반야봉 남쪽의 삼도봉이다. 광대치는 ‘넓고 큰 고개’라는 뜻이다. 동서 양쪽에 계곡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능선과 동쪽의 능선도 해발이 높아 산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이다.

 

[월경산] 해발 981.9m

 

대간이 백운산을 거치면서 중치에서 그 기운이 잠시 떨어지는 듯하다가 월경산에서 다시 원상을 회복한다. 정상은 대간에서 150m쯤 벗어나 있다. 백운산을 한 발치 떨어져서 관찰 할 수 있는 곳이다. 동북쪽에 위치한 백운리에서의 시각으로 ‘달이 기우는 산’이란 뜻이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중치(중재)]

 

서쪽으로 장계와 번암면을 연결하는 비포장도로가 남북으로 진행한다. 백운산의 남쪽 사면과 중치 부근은 목장이 여러 군데 여서 목초를 나르기 위한 임도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중치와 중기마을은 임도로 연결괴어 있다.

‘가운데에 있는 고개’라는 뜻인데 이곳에서는 ‘백운산과 월경산의 가운데’라는 의미다. 운산리에 이 고개 이름을 딴 중재마을이 있다.

 

[중고개재]

 

고개의 동쪽 백운산 자락은 신라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영은사지를 비롯해 많은 암자가 있는데. 특히 선농일치(禪農一致)에 의한 선농불교를 제창한 용성스님이 평소 선사의 지론인 선농일치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미를 들고 세운 농장인 화과원이 이곳에 있다. 그래서 화과원 동쪽 백운산을 넘는 고개는 절고개이며, 중들이 많이 넘나들었다는 이 고개는 중(衆)고개라는 이름이다. 용성스님은 기미독립선언서 대표 33인중 한 분이다.

 

[백운산]1278m

 

백운산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백전면에 경계를 하고 있다.

백운산의 이름은 흰백(白), 구름운(雲)을 써서, 산이 높아서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을 감싸안고 있는 산이라 뜻이다.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장안산과 괘관산, 북쪽에는 깃대봉과 남덕유산, 남쪽으로는 월경산과 봉화산 등이 보인다.

백운산을 만산홍엽의 가을 단풍과 금상첨화로 산허리마다 흐드러진 갈대와 싸리나무, 그리고 산죽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이루는 산으로 유명하다.

 

[선바위고개] 해발 1040m

백운산에서 영취산을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작은 고개이다. 직진하면 영취산정상 이고 서쪽으로 내려서면 무령고개로 이어진다. 고개 위에 큰 바위 하나가 있으며 영취산정상 400m 전에 있다.

 

[영취산 靈鷲山), (본월산 本月山)]1075.5m

 

영취산((靈鷲山)1075.6m (장수군 장수읍,  함양군 서상면) 은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으로 함양 진산인 백운산에서 백두대간이 육십령으로 북상하는 도중에 거치는 산이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금남호남정맥줄기가 갈라져 나간다. 바로 무령고개를 지나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영취산의 물줄기는 동으로는 낙동강, 남으로는 섬진강, 북으로는 금강을 가른다. 북으로 남덕유산이, 서쪽으로 장안산이, 남으로 백운산이 조망된다.

 

장수영취산은 신령령(靈), 독수리취(鷲)를 쓰는데, 그뜻은 산세가 '빼어나다'. '신묘하다'. 신령스럽다는 뜻으로 산줄기와 물줄기의 요충지인 이름에 걸맞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상에는 영취산의 이름이 없다. 혹자들은 장안산을 영취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장안산이 주변의 산줄기중에서 주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영취산(靈鷲山) 1075.6m (장수군 장수읍,  함양군 서상면)
전북 남원시 장수군 영취산은 영산, 또는 취산이라 부르며 신령(靈), 독수리취(鷲)를 쓰고 있다. 영취산은 신라(사위국)의 왕사성(王舍城:金城)의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석가세존이 이 영취산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설법했다.

석가세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 하실 때 하늘에서 4색으로 그린 채화(綵花)를 내리시니, 가섭(迦葉)존자가 이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춤을 추었다고 하여 후세 승려들이 이를 모방하여 승무(僧舞)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목차-※

1.영취산의 유래

2.문헌으로 보는 영취산

3.고지도로 보는 영취산

4.현지도와 구글지도로 보는 영취산

5.결론

 

1. 영취산의 유래

 영취산은 원래 인도 마갈타국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가  이 산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법 했다고 전해 져 오고 있다. 영취산은 "영산" 또는 "취산으로" 축약하여 부르기도 하는데  신령스럽고 신비스러운 산이라 하여  신령(靈)과 수리(鷲)를 쓰는데 "靈자를 쓰는 산으로는 백두산의 영봉과 월악산의 영봉. 여수의 영취산이'이 유명하고  "鷲자를 쓰는 산으로는 영축산.영취산.취서산 등으로 혼합하여 쓰고 있는 영남알프스의 영취산과 고흥의 취령산.군산의 취성산 천안의 취암산 등이 있다.

 

1-2. 백두대간상에 위치하여 혼동이 되고 있는 영취산

 

전라북도와 경상도의 도계이며 전라북도 장수군과 경상남도 함양군의 군계를 나누는 백두대간상 마루금은 백운산에서 남덕유산의 서봉까지이다. 두 군의 경계를 이루는 마루금상 무룡고개(본월치)동쪽에 위치한 마루금에서 금남호남정맥이 분기하는데 분기점에다 최근에 들어 서부국토관리청에서 "영취산"이라는 정상석을 세워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문헌과 고지도를 살펴본 결과를 여기에 기록하여 보다 옳바르고 정확한 확인을 요구하고자 한다.

고문서는 "한국고전변역원"에서 변역한 신증공국여지승람 장수현과 안음현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고 원본은 장수현과 안음현의 읍지를 옮겼다. 고지도는 "서울대규장각"이 소유한 지도를 캡처하여 사용하였다. 현지도는 오만분의 1 랜덤하우스 지도를 사용하였고 위성지도를 구글을 편집하였다.

 

2.문헌으로 보는 영취산

 

※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읍지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전라도 장수현편

 

1-1)지리

동쪽으로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50리, 남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32리,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32리, 북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47리, 서울로부터는 6백 68리 떨어져 있다.

 

1-2)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우평현(雨坪縣)인데 신라 시대에는 고택(高澤)이라 하여 장계군(長溪郡)에 속하였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장계(長溪)를 겸임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원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현으로 하고, 장계 감무(監務)를 겸하도록 하였고, 태종(太宗) 14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3 )산천

영취산(靈鷲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덕유산(德裕山) 현의 북쪽 50리에 있다. 성적산(聖迹山) 일명 성수(聖壽), 현의 서남방 15리에 있다. 백화산(白華山) 장계현(長溪縣)에 있다. 육십현(六十峴) 현의 북쪽 40리,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의 경계에 있다.신라 시대로부터 요해지(要害地)로서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을 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다. 이것이 이름이 되었다. 수분현(水分峴)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골짜기의 물이 한 줄기는 남원(南原)으로 향하고 한 줄기는 본현으로 들어와 남천(南川)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호천(狐川) 현의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남천(南川)과 백화산의 물이 합류하여 호천(狐川)이 되고, 북으로 흘러용담현(龍潭縣) 경계로 흘러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 안음현(安陰縣)편

 

1-1) 지리

안음현(安陰縣)은 동쪽으로 거창군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쪽으로 전라도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57리이며, 남쪽으로 함양군 경계까지 5리이고, 북쪽으로 거창군 경계까지 50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이하생략-

 

1-2) 건치연혁

이안현(利安縣)은 본래 신라 마리현(馬利縣)이다. 경덕왕이 이안현이라 고쳐서 천령군(天嶺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는 합주에 이속시켰고, 공양왕 때에는 감음(感陰)에 이속시켰다. 감응현(感應縣)은 본래 신라 남내현(南內縣)이다. 경덕왕이 여선(餘善)이라 고쳐서 거창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1-3) 산천

성산(城山)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지우산(智雨山)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황석산(黃石山) 현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천왕점(天王岾)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영취산(靈鷲山) 현 서쪽 50리 지점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함양군 경계이다.덕유산(德裕山) 현 서북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전라도 금산군(錦山郡) 및 장수현(長水縣) 경계이다. 육십현(六十峴) 현 서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전라도 장수현 경계이다. 동천(東川) 객관 동쪽에 있다. 덕유ㆍ지우 두 산 물이 현 북쪽에서 합치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양군 남계(藍溪)로 된다.라고 기록하였다.

 

1-4 불우

영각사(靈覺寺)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극락암(極樂庵)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장수사(長水寺) 지우산(智雨山)에 있다. 절 앞에 폭포가 있고, 그 밑에 용추(龍湫)가 있다.

 

 

※ 읍지류에서

 

❷-:안의에서((安陰縣)

山水城山西三里旗泊山一云智雨山北二十里有長水寺寺前有瀑布其下有龍湫(松田四)鳳凰峯卽德裕山東支西北七十里金猿山北二十里下有鶴潭長安山西北六十里長水界靈鷲山西五十里南原界白雲山西三十里咸陽界德裕山西北六十里茂朱長水界○靈覺寺扶田山長安山之南佛影峯德裕山南支月峯山北六十里花林洞西北三十里尋眞洞北二十里猿鶴洞北三十里淸泉白石上下五十餘里愁送臺東北四十里猿川邊有瀑布點風臺在文廟南隅尋眞花林二水合于臺前


 

(성산은 서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기백산 일명:지우산은...생략...장안산은 서북쪽 육십리에 있으며 장수와 경계이다. 영취산은 서쪽 오십리에 있으며 남원과 경계이다.백운산은 서쪽 삽십리에 있으며 함양과 경계이다. 덕유산은 서북쪽 육십령에 있으며 무주.장수와 경계이다 ㅇ영각사.부전산 장안산은 남쪽으로 이어지고...생략...(-운해譯-)

 

아래 거리환산표는 문헌과 고지도에 나타나는 거리(리)를 현지도를 이용하여 환산한 것이다.

 거리환산표(식:00 km×10 ÷4 = 거리)

 

❶-장수에서

 

沿革本百濟雨坪新羅景德王十六年改高澤爲壁谿郡領縣高麗太祖二十三年改長水顯宗九年屬南原恭讓王三年以長溪監務來兼 本朝 太祖元年復析爲長水縣兼任長溪 太宗十三年改縣監邑號長川官員縣監兼南原鎭管兵馬節蹄尉一員 古長水西七里古邑長溪北三十里本百濟伯海新羅景德王十六年改壁溪郡領縣二高澤鎭安隸全州高麗太祖二三年改長溪顯宗九年屬南原恭讓王三年置監務兼任長水 本祖太祖元年析置長水縣來屬坊面邑內終十身南南初五終三十身西西初二十終三十身北北初十終三十水內自邑終十五任縣內北初三十終四十任南北初十五終三十五任北北初四十終六十右三面長澤古縣 陽岳所北六十里 天蠶所北十五○梨方所北三十福興所西二十山水靈鷲山一云長安山東二十里盤據南原安義本邑界德裕山北五十里山北茂朱界山南長水安義界聖壽山一云聖迹山西南十五里鎭安任實兩邑界○雲岾寺新羅眞平王時重修○


 

(이방소는 북쪽삽십리 이고, 복흥소는 서쪽이십리 이다, 영취산 일명:장안산은 동쪽이십리이며 진산(山水)이다. 반거는 남원.안의. 본(本)읍과 경계이다. 덕유산은 북쪽오십리에 있는 산이다. 북쪽은 무주와 경이이며 산 남쪽은 장수.안의와 경계이다. 성수산 일명: 성적산은 서남쪽 십오리 이며 진안.임실 양(兩)읍과 경계이다.ㅇ운점사(팔성암)은 신라증평왕 때 중수했다ㅇ (-譯-)

 

3.고지도로 보는 영취산

 

 ※ 아래의 고지도는 규장각 소유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장수현편과 안음현편 지도를 이어 붙이는 형식으로 편집했다.

 

 대동방여도와 대동여지도(목판본)

위 지도에서는 장안산을 깃대봉(현재 서부국토관리청에 의해 구시봉으로 바뀌었다)에 표기하였다.

 여지도(필사본)

장수현편에서는 장안산를 영취산으로 표기하였고 무룡고개에다 본월치라 표기하였으나 안음현 지도에는 장수계와 남원계만 표기되어 있다.

 조선팔도지도(필사본)

장수현편에서는 영취산과 장안산을 다르게 표기하였으나 안음현편에서는 덕유산과 육십현만 표기되어 있다.

천왕점(괘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백운산이 표기되어 있다.(참고: 천왕점은 천왕봉의 정상을 말하는 것으로 경상도 지방의 산에 나타나고 있다)

 지승(필사본)

 장수현과 서상면 일대를 그린 지도이다

장수현쪽에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뚜렷하고 본월치와 중치.육십령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안음현쪽 지도에는 장수계와 남원계로만 표기하였다.

그러나 영각사와 부전산.극락암 등을  기록하였는데 읍지류 안의에서 살펴보면 극락암이 영취산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청구도와 청구요람(필사본)

정상기의 지도로 본월치만 표기되어 있다.

영취사는  분기점에서 백운산으로 이어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상 헬기장이 있는 1066봉이나 제산봉 북사면으로 추측된다.

 팔도지도(필사와 목판)

이 지도는 현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영취산을 장안산에 표기하였고 본월치 윗쪽(분기봉) 본월산으로 표기하였다. 안으쪽 지도에는 본월치로 표시하였다.

 팔도분도(필사본)

장수편 지도에는 백두대간 왼쪽(무룡고개)에 영취산을 표기하였으나 안의편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동여도(필사본)

부전산은 현재의 덕운봉을 일컫는다.

 

이와 같이 표기한 고지도의 대해 1872년에 그려진 팔도지도 장수현도에는 거리와 함께 현재의 지명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가 그려진지는 137년 전이므로 현재의 지명과 동일하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천지가 개벽 된 것일까?

1872년 지방도 전라도편 장수현지도 (서울대규장각소유 그리고 해설)

 

장수현지도 長水縣地圖, 장수현은 지금의 전북 장수군 장수읍, 천천면, 계남면, 장계면, 계북면 지역에 해당하며, 읍치는 장수읍 장수리 일대에 있었다. 백두대간의 서쪽 사면 고지대에 위치한 궁벽진 고을로 금강 상류인 장계천이 북쪽으로 흘러나가고 있다.원래 이 지역에는 조선초기까지 長溪縣과 長水縣 두 고을이 있었는데, 1414년(태종 14)에 장계현을 병합하여장수현으로 만들었다. 지도에서도 水內, 水西, 水南 등은 장수현에 속했던 지역이고, 溪北, 溪內, 溪南 등은 장계현에 속했던 지역이다. 지형적으로도 두 지역이 분지의 형태로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을의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靈鷲山이 고을의 진산인데 무주의 덕유산에 뻗어온 산줄기이다. 그 위쪽에는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도 안의로 이어지는 六十嶺이 보인다. 육십령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간요해처로서 이후 도적이 많아 행인 60명이 모여야만 안전하게 넘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읍치 서쪽의 新光寺는 지금의 천천면 와룡리 신광마을 서쪽에 있는 것으로 신라 흥덕왕 5년(831) 무량국사가 창건하였고, 1849년(헌종 15) 당시 장수현감 조능하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또한 읍치의 서남쪽에는 合米城古址가 표시되어 있는데, 합미성은 후백제 때 축성된 것으로 전하는 성이다. 

說:장수현도로 영취산이 크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 중요한 부분은 "장안동"으로 영취산 아래 "영취고허" 와 장안동.괴목.노치가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장안동의 동(洞)은 사람이 사는 계곡을 뜻 하는 것으로 마을의 뒷 산은 자연스럽게 "장안산"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취산은 신비스러럽고 영험한 산으로 보아 장안산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고.....

하여튼! 현대지도를 고지도들과 비교 해 보았다.

 

4.현대지도와 구글로 보는 영취산

 

랜덤하우스 5만분의1 지도이다.

 이 지도는 계곡선과 주곡선 따라서 산줄기 긋고~~물줄기 긋고~~고지도에 나타나는 지명과 현재의 지명을 비교분석하여 자판기 두드리고 그렇게 하여아둔한 머리로 보름 걸렸다.

 .........................................

그리고 나 처럼 눈 나쁜사람들 쉽게 보라고 양파껍질 벗기고 햐앟게 속살 드러내 놓고 보니 아래와 같다.(전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백지도

중앙에 "?"는 금남호남정맥이 장안산에서 밀목치를 향해 가다가 북쪽으로 꺽여지는 꼭지점인데 그 꼭지점에서 노치를 지나고 싸리재를 지나 법화산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 낳아 놓는데 그 지점을 조선팔도지도에서는 "영취산"으로 표기 해 놓았다.(참고: 이 곳을 찾았던 어느 산님이 점잖게 "백운산"이라 쓴 표지기를 걸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착각하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삼각고지라 하지만 . 나는 "?"가 영취산이든 이름없는 무명봉이든 간에 관심이 없어 아래의 같이 구글지도를 만들어 보았다. 

 구글지도

 

5.결론

 

이제 결론을 내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영취산의 위치에 대해 서부국토관리청에서 정상석을 세워놓은 금남호남 분기점이 "영취산"인가?

장안산의 또 다른 명칭이 "영취산'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나의 소견임은 전제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 답은?

금남호남분기점은 무명봉일 뿐이며 영취산은 장안산(一云)과 동일할 뿐이다.

 

풀이....

1. 문헌  상 나타나는 영취산의 위치에 대해 안의쪽에서 보면 금남호남 분기점을 영취산으로 볼 수 있다.

   (서상에서 바라보는 분기점과 1066봉은 기세가 대단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보일 수 있다)

 

2.그러나 안의편 고지도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영취산에 대한 표기를 찾아볼 수 없다.

 

3.장수편 고지도에서는 영취산이나 장안산 그리고 본월치를 표기 해 놓아 영취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하였다.

 

4.신증동국여지승람과 장수현 읍지류에 영취산은 일명 장안산(山水靈鷲山一云長安山東二十里=영취산은 일명 장안산이며 읍치로부터 이십리 지점에 있다) 이라 기록 해 놓았다.

 

이와 같은 근거에 의해  영취산은 장수군에 속한 장안산의 다른(애칭) 이름(이는 영남알프스에 있는 영취산이 취서산. 영축산 등으로 불려지는 것과 동일하다)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금남호남정맥이 지나는 백두대간상 분기점에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고지도상에 나타나는 본월치에 갈음하여 "본월산"이 되어야 한다.

 

분기점(1076.5봉)은 선바위고개 안부를 지나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상 1066봉(헬기장)과 쌍봉을 이루고 있는데(현지사람들은 "형제봉"이라 부른다) 이것은 백두대간상의 마루금일 뿐이고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또는 장수군과 함양군의 경계에 있을 뿐이다.

 

넋두리... 

 

장안산(영취산)은 충청남도와 전라도 일원에 있는 모든 산줄기를 거느리고 있는 종산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강원도 태백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영남과 경기일원의 젖줄이 되듯이 장안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 역시 금강과 섬진강의 젖줄을 이루어 호남평야의 대 정맥을 이루어 놓는다.

 

장안산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각도가 다르겠지만 덕유산이나 백운산.팔공산에 서서 구름위에 나타나는 장안산의 정상부를 바라보면 구름위를 비행하는 독수리처럼 신비스럽게 보일게다.

 

따라서 금남호남 분기점이 장안산을 연결하는 이음새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취산의 시작점은 될 수 있을지언정 장안산과 일운하는 영취산의 정상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조 중종의 명으로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고지도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역시 현지를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자료나 구술에 의해 목판했을 것이고 이러한 표현방법은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야 입으로 듣고 상상으로 창작하고 그렸을 것이니 무릉도원이었을 것이고 책자나 그림에 나타나는 신비스러운 세계였을 것이다.그래서 우리나라엔 서시가 빨래 했다는 "약야계"도 있도 물줄기가 길고 아늑하다는 "장안"도 있고 백운도 있고 영취도 있다.

 

엣 날에 양반이 갓 쓰고 산에 가는 것 상상만 해 봐도 거짓말일게야~~

그 당시에는 호환이 무서워 어둡기가 무섭게 자빠졌을게고~~

에~헴 했것지~~

 


 급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 해 살아가기도 힘드는데....

새 것(지명) 다 좋은 것은 아녀!  옛 것이 좋은 것이여!

................................................................................

一云~~ 영취산이나 장안산이나 같은 말이여~~

 

아버지나 아빠나 같은 말이고 ~~~

 

그런데 마누라와 애인은 틀린말여~~

 

착각하지말어~~

 

어떻게 분기봉이 영취산이 될 수 있어!

 

정신들 차려!


 

사견임을 전제로...........

금남호남분기점은 청구도에 표기된 본월치와 팔도지도에 표기된 "본월산(本月山)로 불려지기를 바란다.

 

구글 "운해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귀한자료 소중하게 활용하겠습니다.

 

 

[금남호남정맥]

 

전북 장수의 장안산(長安山:1237m)에서 서북으로 뻗어 무주의 주화산(珠華山:600 m)까지 약 65km에 이르는 옛 산줄기의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져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주는 산줄기이다.

 

장안산에서 수분현(水分峴:530m) ·팔공산(八公山:1151m) ·성수산(聖壽山:1,059m) ·마이산(馬耳山:667m) ·부귀산(富貴山:806m)으로 이어져 주화산에서 끝난다. 또 주화산에서는 금남정맥이 시작되어 호남정맥으로 이어진다. 또 이 산줄기의 팔공산 서사면(西斜面)에서 발원하는 천천(天川)이 북류하여 금강을 이루고, 남사면(南斜面)에서 발원하는 오원천(烏院川)이 섬진강을 이룬다.

 

[호남정맥]

 

전라북도 장수군 주화산(珠華山)에서 뻗어 내장산에 이르러 전남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다시 전남 광양시의 백운산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종착지인 주화산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내장산에 이르고, 내장산에서 남진하여 장흥 제암산(帝巖山)에 이르며, 제암산에서 다시 남해를 끼고 동북으로 상행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영산강 유역을 이루는 서쪽 해안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갈라놓았다. 이 산줄기의 산들은 대체로 곰재·만덕산·경각산(鯨角山)·오봉산·내장산·백암산·추월산(秋月山)·산성산(山城山)·설산(雪山)·무등산·천운산(天雲山)·두봉산(斗峰山)·용두산·제암산·일림산(日林山)·방장산(方丈山)·존제산(尊帝山)·백이산(伯夷山)·조계산·희아산(戱娥山)·동주리봉·백운산 등이다.

 

-영취산 기슭의 의암 주논개

 

충절의 여신 주논개는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대간에서 나고 대간에 묻힌 것.

논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 경상우도의 병마 절도사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 산이 물을 가르는 상징적인 곳, 장수 수분치(水分峙)

 

호남정맥의 시발점인 영취산에서 서진(西進)하여 완주의 주화산까지가 섬진강과 금강을 가르는 산줄기이다. 19번 국도가 호남정맥을 관통하는 곳이 수분치(水分峙)인데 이곳이 산이 물을 가르는 상징적인 곳이다. 금강의 발원지는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신무산(896.8m) 북동계곡의 ‘뜬봉샘’으로 알려져 있다. 장수는 산고수장(山高水長), 즉, 산이 높고 물이 긴 고장이다. 이 때문에 이름도 긴장(長), 물수(水)를 쓴다.

 

수분치(水分峙)는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령(分水嶺)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이름이 수분재이며, 지명도 물을 나눈다는 뜻으로 장수읍 수분리(水分里)이다. 특히, 수분치에서 서쪽으로 0.5km 위치에 있는 원수분마을 뒤산인 신무산 기슭에는 금강의 발원샘인 ‘뜬봉샘’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옛전에 이 수분재에 집이 있었는데, 이집의 지붕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수(天水)가 남쪽가면 섬진강, 북쪽으로 가면 금강의 물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수분재는 주유소와 휴게소 등이 들어서서 분수령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만, 분수재 위에 있는 소나무를 정맥꾼들이 ‘수분송(水分松)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분수령으로 삼고 있을 뿐, 농경지 개간으로 정맥의 능선이 뭉개져 능선 구분도 어렵게 되어 있다.

 

- 팔공산에서 만나는 네 줄기의 강줄기

 

영취산에서 서진하던 정맥(正脈)은 수분재에서 서북(西北)으로 급히 방향을 틀어 신무산을 거쳐 국도 13번과 만나는 차고개을 건너 팔공산에 이르게 된다. 팔공산은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을 품고 있는 산이다. 팔공산은 전북의 장수군과 진안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인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오른쪽인 동쪽으로 흐르면 금강의 물줄기가 된다. 호남정맥이 금강과 섬진강을 가르는 산줄기라 했으니 왼쪽으로 흐르면 당연히 섬진강의 물줄기가 된다.

 

그런데 팔공산에서 서진하여 분기하는 지맥이 있다. 마령치를 건너 구름재에 이르면 이 지맥은 다시 스스로 분기하는데 오른쪽으로 분기해간 지맥이 성수지맥이요, 왼쪽으로 분기해간 지맥이 개통지맥이다. 이 지맥은 장수-진안-임실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팔공산에서 보면 네 개의 유역을 만나게 된다. 팔공산의 오른쪽을 흐르는 금강유역이 그 하나요, 성수지맥과 팔공산의 앞으로 진행하는 호남정맥사이의 섬진강이 그 둘이며, 영취산에서 팔공산을 돌아 개통지맥으로 갈리는 요천이 그 셋이며, 마지막 넷은 성수지맥과 개통지맥으로 갈리는 오수천이다.

 

[호남정맥]

 

전라북도 장수군 주화산(珠華山)에서 뻗어 내장산에 이르러 전남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다시 전남 광양시의 백운산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종착지인 주화산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내장산에 이르고, 내장산에서 남진하여 장흥 제암산(帝巖山)에 이르며, 제암산에서 다시 남해를 끼고 동북으로 상행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영산강 유역을 이루는 서쪽 해안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갈라놓았다. 이 산줄기의 산들은 대체로 곰재·만덕산·경각산(鯨角山)·오봉산·내장산·백암산·추월산(秋月山)·산성산(山城山)·설산(雪山)·무등산·천운산(天雲山)·두봉산(斗峰山)·용두산·제암산·일림산(日林山)·방장산(方丈山)·존제산(尊帝山)·백이산(伯夷山)·조계산·희아산(戱娥山)·동주리봉·백운산 등이다.

 

[금남호남정맥]

 

전북 장수의 장안산(長安山:1237m)에서 서북으로 뻗어 무주의 주화산(珠華山:600 m)까지 약 65km에 이르는 옛 산줄기의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져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주는 산줄기이다. 장안산에서 수분현(水分峴:530m) ·팔공산(八公山:1151m) ·성수산(聖壽山:1,059m) ·마이산(馬耳山:667m) ·부귀산(富貴山:806m)으로 이어져 주화산에서 끝난다. 또 주화산에서는 금남정맥이 시작되어 호남정맥으로 이어진다. 또 이 산줄기의 팔공산 서사면(西斜面)에서 발원하는 천천(天川)이 북류하여 금강을 이루고, 남사면(南斜面)에서 발원하는 오원천(烏院川)이 섬진강을 이룬다.

 

[낙동강]

 

영남지방 전역을 유역권으로 하여 그 중앙 저지대를 남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 길이 506.17km. 유역면적 2만 3384.21㎢. 압록강(鴨綠江) 다음가는 한국 제2의 강이다. 강원 태백 함백산(咸白山:1,573m)에서 발원하여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곡류하다가 함창(咸昌) 부근에서 다시 내성천(乃城川)·영강(嶺江) 등 여러 지류를 구심상(求心狀)으로 받아들이고, 유로(流路)를 남쪽으로 돌려 상주(尙州) 남쪽에서 위천(渭川)을, 선산(善山) 부근에서 감천(甘川), 대구(大邱)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 남지(南旨) 부근에서 남강(南江)을 합친 뒤 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삼랑진(三浪津) 부근에서 밀양강(密陽江)을 합치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옛날에는 내륙지방의 교통동맥이 되어 조운(漕運) 등에 크게 이용되면서 강기슭에 하단(下端)·구포·삼랑진·수산(守山)·풍산(豊山)·안동 등의 선착장이 번창하였고, 또 6·25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최후 방어선이 된 바 있다. 한편, 김해삼각주 말단부에 있는 을숙도(乙淑島) 일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철새도래지이다.

 

[섬진강]

 

길이 212.3 km. 유역면적 4,896.5 km2.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에서 발원하여 진안군 백운면(白雲面)과 마령면(馬靈面) 등에 충적지를 만들고, 임실군 운암면(雲岩面)에서 갈담저수지로 흘러든다. 곡성읍 북쪽에서 남원시를 지나 흘러드는 요천과 합류한 후 남동으로 흐르다가 압록 근처에서 보성강과 합류한다. 그 이후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지나 경남 ·전남의 도계(道界)를 이루면서 광양만(光陽灣)으로 흘러들어간다. 대체로 강너비가 좁고 강바닥의 암반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항해하는 데는 불편하다.

 

[데미샘]

 

데미라는 말은 더미(봉우리)의 전라도 사투리.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팔공산 북서쪽의 '천상데미(하늘에 오르는 봉우리)' 서쪽 기슭,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마을 북쪽 계곡 상추막이골에 위치. 천상데미에 있는 샘이라 하여 데미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수정같이 맑고 이가 시리도록 차가우며 다른 어떤 샘에서도 맛볼 수 없는 미묘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무령고개] 900m

 

무룡고개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장계면 경계에 위치해 있다.
해발 930m의 높이로서 장안산(1075.6m)과 영취산(1236.7m)이 만나는 안부의 고개다.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금남호남정맥'이란 이름으로 이 고개를 거쳐서 장안산으로 넘어간다. 

 

무룡고개는 금강과 섬진강의 물줄기를 가르는 가장 먼 분수령이다.
번암면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장계면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으로 들게 된다.
또한 영취산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빠지게 된다. 따라서 영취산은 3강 분수점이 되는 지점이다. 

 

무룡고개 유래..

 

대부분의 지도에 '무령고개'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무룡'을 잘못 알아듣고 '무령'으로 표기한 것으로 간주된다.

풍수상의 '무룡궁'이라는 지명과 연관해 볼 때 '무룡고개'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란 판단이다.


무룡(舞龍)은 '용이 춤을 춘다'는 뜻이다.
무룡궁(舞龍宮)이라 부르는 큰 명당에서 연유한 것으로 본다.
산세가 마치 용이 꿈틀꿈틀 살아서 무룡고개에서 장안산으로 올라가는 형상이라 한다.

 

또한 선인들은 호남인의 재질과 예기가 이상의 무룡궁의 산경에서 부터 보았다는 것이다,
무룡궁의 산세가 힘차게 치솟아 장안산에 좌정한다. 그러므로 장안산은 호남과 호서의 조산이며 진산이다.
무룡궁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서북으로 금강의 최상류지대 이며, 서남은 섬진강의 최상류이고, 동남은 낙동강의 상류지대가 된다.
장안산과 영취산을 이어주는 무룡고개는 풍수지리학상으로 입수(入首)라 표현하는데, 이는 머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을 넘는 첫 고개로, 마치 춤추는 용과 같다 해서 고개이름을 무룡이라고도 불린다.

 

 [민령]

 

깃대봉과 영취산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참고점이다. 백운산은 논개의 고향이다. 생가는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고, 무덤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이다. 민령은 바로 논개의 생가와 무덤을 오가는 대간의 고갯길이다. ‘밋밋한 고개’라는 우리 이름인데, 소리에 따라 ‘岷’이라는 한자를 음차하였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깃대봉(구시봉) ]1014.8m

 

장수군 장계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경계에 있다. 옛날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들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땅을 하사했는데, 이를 사패지(賜牌地)라 했고, 이 땅에는 누구의 사패지라고 하는 깃대를 꽂아 놓은 데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2006년 1월 6일 '구시봉'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그 아래 주둔했던 군사들이 기를 꽂았다고 하여 '깃대봉'으로 불렸었으나, 옛날 한 풍수가 이 산에 올라 산의 형태가 구시형이라 하여 2006년 1월 6일 '구시봉'으로 지명이 변경되었습니다. -산림청-

 비 뒤에 새겨있는 설명이다.

 

구시봉?? 

구시가 말구유를 뜻한다면,

아마도 이 지명은 깃대봉과 그 아래쪽의 제2 깃대봉을

잇는 안부를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 아닐까 싶다.(육성철님 글에서)

 

'구시'라는 말은, 말구유 그"구유"의 서부경남지방 사투라가 "구시"라네요.??!!

 

깃대봉(구시봉)은 특히 가을의 억새와 구절초 향으로 유명하다.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 남덕유산, 동으로는 기백산, 남쪽으로는 장안산과 백화산이 보인다.

 

◆[육십령]

 

덕유산과 백운산을 가르는 고개로 조선조 이전에 개통된 고개다. 지금은 장수군 장계면과 함양군 서상면을 잇는 26번 국도가 지나가고 마루에는 휴게소가 있다. 장계에서 서상까지의 거리가 예전에 60리에 해당했으므로 육십령으로 부른다.

육십령으로 통하는 요새지 중에서 서하면 봉전리 황석산성이 있다. 선조 30년(1597년)에 왜군의 2차 침입이 일어나자 함양국수 조종도와 안음현감 곽준은 영·호남을 잇는 육십령을 왜군이 반드시 노릴 것으로 판단하고 군민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맞싸웠다. 중과부적이기도 했지만 장수인 김해부사 백사림이 ‘성 밖으로 나오면 잡지 않겠다’는 왜군의 속임수에 빠져 성문을 열고 도망치는 바람에 요새는 함락되었고, 조종도와 곽준도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백사림은 정부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고, 왜군 사령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요새를 함락시킨 왜장에게 포상했다고 하니 황석산성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일전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육십령 -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도 하는데, 소백산맥 중의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전주~대구 간 26번 국도가 지나간다. 예부터 함양-장수 주민들의 물류를 교환했던 고개라고 한다.

 

1.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의 거리가 60리(24km)이고 장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도 60리(24km)라고 하여 육십령.

   - 여암 신경준의 山經表 에는 "六十峙"- 南來 安義西六十里 長水北四十里 라고 쓰여있다.

    즉 안의 서쪽 60리, 장수 북쪽 40리에 "육십령"이 있다는 뜻이다.- 

2. 이 고개를 넘으려면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어 육십령.

 

3. 옛날엔 이 고개에 산적들이 많아서 60명이 모였다가 올랐다는 이야기인데,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 양쪽 산아래 마을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밑에는 장정들이 모여 있던 주막이라 해서 장군동(壯群洞)이 있고, 산적을 피해서 살다가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해서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어 세 번째 이야기가 신빙성이 높다.

 

4. 박정희 대통령은 군장동 사람들에게 산 속 군장동에 살지 말고 길가에 나와서 살라고 흙벽돌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고갯마루 연립주택식으로 지어진 하얀색 집들이 그때 박 대통령이 지어준 집들이다. 군장동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이 그때부터. 육십령마을이 군장동 사람들에게 새 삶의 터전이 된 것도, 고개이름이 육십령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한다.

출처 : 밤송이
글쓴이 : 밤송이 원글보기
메모 :

'◉ 백두대간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대덕산, 삼도봉구간  (0) 2011.03.08
[스크랩] 덕유산구간  (0) 2011.03.08
[스크랩] 고남산구간  (0) 2011.03.08
[스크랩] 지리산 구간  (0) 2011.03.08
백두대간의 환경실태  (0) 2011.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