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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이야기

[스크랩] 대덕산, 삼도봉구간

[수정봉] 1030m

 

아무런 표식이 없어 구분이 잘 안되고 편안한 등로를 이어가다 우측으로 휘돌아 나가게 되어 있다. 정상엔 잡목들로 전망이 가려져 있다.

 

[된새미기재]

 

호절골재에서 30분 남짓한 거리에 봉산리에서 올라오는 소로와 만나는 지점이다. 고개이기는 하지만 허리목은 아니다. 북쪽의 전북 무주는 지대가 높고 남쪽의 경남 거창은 지대가 훨씬 낮은 것이 확연하게 관찰된다. ‘큰(된) 새목 고개’이다. ‘된새목이재>된새모기재>된새미기재’로 변화했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호절골재]

 

삼봉산과 1090봉 사이의 움푹 들어간 허리목이다. 삼거리에서 금봉암으로 넘어가는 소로가 교차한다. 남동쪽으로 45°에 가까운 경사면이고, 북서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계곡인데, 채소밭이 펼쳐져 있고 여러 개의 지류가 모여 삼거리 독가촌 마을 앞을 지난다. 고개에는 공터가 조성되어 있다. ‘막힌(絶) 계곡(谷)의 안쪽이 매우 넓다(浩)’는 뜻인데, 오늘날 모두 채소밭으로 개간되어 있으니 기막힌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덕유 삼봉산] 1254m

 

삼봉산은 거창의 진산이다. 거창 고읍지 및 조선환여승람 거창군 산천조에도 ‘삼봉산은 거창 북쪽 오십리에 있으며 무주로부터 대덕산 서쪽 가지라 적혀 있다. 해발 1,254m의 거봉으로 봉우리가 셋이라서 삼봉(三峰)이란 이름을 얻었다. 향적봉에서 바라 봤을 때 이 봉우리가 뚜렷한 ‘山’자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 가운데 어느 한 봉우리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산세를 지니고 있어 소금강이라 부르기도 하는 삼봉산은, 정상의 주봉을 중심으로 투구봉 노적봉 칠성봉 신선봉 석불바위 장군바위 칼바위 등으로 이름 붙은 자연산경과 금봉암(金鳳庵)이 어우러져, 소금강의 신비경을 연상케 한다.

 

거창과 무주를 경계 짓는 삼봉산은 이 같은 덕유연봉(德裕連峰)이 시작되는 첫 머리봉.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삼봉산을 ‘덕유원봉’이라 부르며 자긍심을 내보이기도 한다.

 

금봉암의 바위 샘물과 관련하여 천지인(天地人)을 우러른 삼신사상(三神思想)과 인연이 깊다.

▶ 문헌과 지도에는 1264m로 되어 있다

 

[금봉암]

 

금봉암은 고제면 봉산리 삼봉산(1,254m) 기슭에 있다. 금강은 본디 봉황새만이 깃드는 곳을 일컫는데 절이 황금빛 봉황의 이름을 갖고 자리 한다. 금봉암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절 터에 1905년 주상면 거기리에 살던 불심 깊은 청송 심씨가 세운 절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청송 심씨가 풍수가 잡아준 지금의 절 자리에서 원을 세우고 지금은 알 수 없는 가마솥 뚜껑 덮인 장수 샘물을 마셔가며 백일동안 단식기도를 드렸다 한다. 기도가 끝나던 날 이상하게도 어느 곳에서 날아 왔는지 알 수 없는 황금빛 새가 날아와 기도처를 세 번이나 돌고 난 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그 뒤 절을 짖고 금봉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이 절에는 이름난 세 개의 바위, 세 개의 용머리, 세 개의 바위샘이 있다.

요사체 뒤에 용바위, 용굴에서 내려와 얼굴을 쑥 내민 세 개의 용머리가 있는데 맨 윗쪽 용머리가 옛날 거창 부사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금봉암을 나한도량으로 영험스런 기도처로 알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세 개의 샘이 자랑거리로 이름나 있다. 석불바위 뒤에 숨어 있는 샘을 피부병에 좋다 하며, 칼바위 위 바위굴 샘은 기도샘이고, 용바위 용굴샘은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 한다.

 

[소사고개] 680m

 

소사라는 마을 이름은 집집마다 마루바닥에 가는 모래가 깔리는데, 일년 내내 미풍이 불어 쌓여있는 모래가 모두 날아가 기쁜 마음으로 소사현(笑沙峴)로 불려졌다 한다.

이 지역 일대는 정확한 대간 길의 독도가 까다로운데 그 이유는, 백두대간 대부분의 고개가 도(道)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나 소사고개(680m)는 경상남도 거창 땅이며 고갯마루에서 전라북도 무풍 방향으로 10여분 걸어내려간 '도계'(道界) 마을이 경계지점이다. 따라서 고개 이름을 전라도 쪽에서는 '도마치'라고도 부른다. 도계에서 '항상 농사가 잘 된다'는 무풍(茂豊)까지는 약 9km. 태풍 루사가 지나갔던 곳이다.

 

[무풍]

 

무풍은 전라도 무주와 충청도 영동 그리고 경상도 거창으로 갈라지는 곳이라며 그래서 '무풍 지경(地境)이'라고 부른다.

무풍은 소사동에서 발원한 남대천을 끼고 터전을 잡은 고을로, ‘무풍’이라는 이름은 이미 통일신라 때 지어졌다고 한다.

 

봉황을 닮은 대덕산 아래에 위치하여서인지(대덕산의 서북쪽) ‘정감록’은 전쟁 등 큰 재앙이 발생시 우리가 숨어야할 안전한 피난처 즉 三災不入之地(전쟁과 질병이 없고 흉년이 들지 않는 살기가 좋은 곳) 으로 십승지(十勝地)를 말하고 있다. 무풍은 피난하기 좋은 십승지 중의 한 곳일 뿐만 아니라 ‘삼豊’ 중의 한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같은 큰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 곳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 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지금도 무주군의 대표적인 성 씨인 밀양 박 씨, 안동 권 씨, 문화 유 씨 등으로 살고 있다.

 

무풍은 백제와의 사이에 나제통문을 경계로 예전에는 신라 땅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으나 언어와 풍습, 생활은 경상도, 즉 김천과 거창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신라 땅이었던 무풍은 본디 무산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져서 지금의 김천인 개령군에 속하게 됐다고 한다.

그 뒤 1414년(조선 태종 14)에 무주현으로 편입됐고, 1914년부터 무주군 무풍면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인위적인 행정 구역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산줄기로 갈라지지 않은 한에는 한 마을 정서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왕조의 절대 권위보다 더 큰 산의 영향력이다. 이것이 백두대간의 진실이다.

 

[나제통문]

 

구천동 33경으로 선정된 그 절경 가운데 제1경은 나제통문이다. 무풍면과 설천면 사이의 석모산의 바위를 뚫어 만든 굴문인 나제통문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무주군은 오랫동안 경상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인 적천현과 신라땅인 무산현으로 나뉘어 있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로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땅을 가르는 경계였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로 오랜 세월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군 안에서도 풍습과 문물이 다르고, 말씨마저 서로 달랐다. 지금도 설천 장날에 가면 사투리만으로도 무주와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무풍면 사람들은 큰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갈 때 주변의 거창이나 대구로 향하지만, 설천면 사람들은 무주읍이나 대전으로 일을 보러 간다고 한다. 생활권역이 다르다는 이야기. 현재는 이곳에 옛날식 초소를 지어 놓고 옛복장을 한 수문장이 있다.

 

- 그러나 진실은? 역사 교과서에서 사라진 나제통문 이야기

 

이 문이 삼국시대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일제시대 때 뚫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이 굴의 원래 이름은 기니미굴. 1910년경 일본 사람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신속히 옮겨가기 위하여 뚫은 굴로 당시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였다는 것. 그래서 당시 이 ‘기미니굴’을 중심으로 위쪽마을은 ‘기니미 마을’로 아래쪽은 ‘이미리 마을’ 이라 불렀다. 이 굴의 명칭이 바뀐 것은 1963년 무주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기니미굴'이 '나제통문'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등장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필수코스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지역 노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굴을 뚫을 당시의 현장을 목격한 노인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인데 그러나 무주군의 행정기록을 적어놓은 무주 군청지인 ‘적성지’에 당시 공사를 한 작업일지가 적혀있다고 한다. 한국우리민족사 연구회는 이런 사실을 추적해 역사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을 삭제하게 만들었다.

 

- 우리나라의 첫 여성의병

 

나제통문 옆에는 강무경 의병장의 동상이 있고, 그 옆으로는 부부 의병 사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의병장 강무경과 결혼한 뒤 남편과 함께 무장 의병활동을 한 고(故) 양방매 씨의 업적을 기린 것이다. 전남 장흥과 보성, 강진, 해남 일대를 돌며 10여 차례에 걸쳐 항일투쟁을 했던 양 씨는 1909년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2005년 광복 60돌을 맞아 무장 의병활동을 한 첫 여성으로 인정되었다.

 

[초점산(삼도봉)] 1249m

 

전북과 경북, 경남의 도계를 이룬다. 군으로는 무주와 김천, 거창이다. 민주지산이 있는 삼도봉에서는 매년 3개 도 합동으로 화합행사가 열리지만 이곳에는 그런 행사가 없다. 서족으로 덕유산의 군봉들이 가까운 거리로 다가서 있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대덕산(투구봉)] 1290.9m

 

대덕산은 이곳으로 살러 오는 사람은 모두 많은 재산을 모아 덕택을 입었다 하여 대덕산으로 불리워졌다 한다. 대덕산은 가야산을 향해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을 갈라 놓은 삼도 분기점, 즉 해발1,250m의 초첨산을 옆에 둔 명산으로, 옛날에는 다락산, 다악산으로 불리었고 정사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하는 명산이다.

 

[삼도봉]

 

삼도봉(三道峰)이란.. 이름 그대로 3개의 도(道)에 걸쳐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남한에 삼도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몇 개나 될까? 모두 3개인데, 다 백두대간 줄기에 있다.

 

1. 흔히 초점산 정상으로 알려진 삼도봉(1,248.7m)으로 경북, 전남, 전북을 구분짓는다. 대화합기념탑이 위치한 민주지산 삼도봉의 남쪽 바로 이웃한 봉우리로 대덕산과 이어지는 산이다.

 

2. 지리산의 서부능선에 위치한 삼도봉(1,550m)은 경남, 하동군과 전남, 구례, 전북의 남원의 경계 지점에 솟아 있다. 반야봉 바로 아래 위치한 삼도봉의 원래 이름은 낫의 날을 닮아 낫날봉. 발음이 쉽지 않아 '날라리봉' '늴리리봉'으로 불리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삼도봉으로 새 이름을 부여 받았다.

 

3.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민주지산의 삼도봉으로,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전북 무주의 경계한 삼도봉(1,177m)이다. 경계를 가르는 도가 완전히 달라 "오리지널" 혹은 "혼또"라는 수식어가 흔히 붙는다. 이 삼도봉 정상에는 3개의 도시 주민들이 세운 대화합 기념탑이 있다. 국립공원 소백산과 속리산을 거쳐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백두대간이 덕유산을 향해 고도를 높이다가 3개도의 경계 지점에 이루러 우둑 솟구쳐 오른 봉우리이다.

 

[덕산재] 644m

 

김천시 대덕면-무주군 무풍면을 넘는 30번국도이며 대덕산 아래 덕산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삼도봉과 대덕산 사이의 고개로 예전부터 전북과 경북의 서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였다. 지금은 무주에서 성주를 잇는 30번 국도가 지나간다. 고갯마루에는 휴게소와 주유소가 있다. 대덕면 덕산마을에 있는 고개라 하여 덕산재라고 한다. 일제 때 발행된 고지도에는 ‘주치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폐광터]

 

물한리의 황점, 핏들, 가래점 등 세 마을은 2백여년 전 제철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산위에 철마암(鐵馬岩)은 당시 일꾼들이 정초가 되면 산 위에다 철마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부근 계곡 일대에는 지금도 철광석이 더러 눈에 띄며, 폐광터도 보인다.

 

[선황당재]

 

약간 평평한 안부로 별다른 표식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부항령] 690m

 

무주 무풍 금평리 숙뱅이-김천 부항 어전리 가목을 넘나드는 재. 백두대간의 오래된 고갯마루인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부항현’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제는 고개의 구실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래로 삼도봉 터널이 뚫렸기 때문이다. 고갯마루 일대에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개 이름의 유래는 부항면 어전리에서 찾을 수 있다.

 

-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지명 유래

 

1. 어전(漁田)·어전리·어전골

임진왜란 때 허인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피난 와서 보니 들판의 형상이 마치 물고기처럼 생겼다 하여 어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 마을 이름이 없을 때 어떤 도인이 이 마을에 와서 보니 동네 서쪽의 작은 폭포수 아래에서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놀고 있어 어전이란 마을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어전재·어전령은 어전리 서쪽에 있는 고개로 경상북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신라군과 백제군이 싸웠던 재라 한다.

 

2. 가목·가매실·부항(釜項)

마을이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하다가 지금은 한자로 부항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가목이라 하는데, 이는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가목재에서 감내의 큰 줄기샘이 발원한다. 마을이름의 기원으로는 가마-가미-거무(거미)-거북의 의미 상통함으로써 농경사회에서의 숭배대상인 거북 신앙 곧 물신앙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도봉(부항령) 터널]

 

부항면은 국토의 대동맥인 소백산맥의 줄기인 삼도봉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산이 높아 사방으로 나가는 길이 없어 면관내에 들어오면 다시 들어왔던 길로 나가야만 다른 지역에 갈 수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1999년 12월 6일 삼도봉터널(391m : 경북 151m, 전북 240m) 개통으로 무주로 가는 길이 개통되어 영‧호남인이 더욱더 가까워졌으며, 삼도봉 터널 앞 소공원은 영호남인의 화합과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교통량이 거의 없어 여름이면 500m 터널 양쪽으로 사람이 지나다닐 길이 없을 만큼 돗자리를 펴고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속도를 줄이거나 함께 피서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들려옴.

 

[백수리산] 1034m

 

정상에 헬기장이 있으며 넓은 공터로 사방이 나무들 우거져 있어 휴식장소로는 좋지만 조망하기엔 부적합하다.

 

[삼도봉] 1,176m

 

민주지산의 봉우리로 백두대간의 줄기를 이루는 삼도봉은 경북(김천), 전북(무주), 충북(영동)에 걸쳐 있다. 원래는 화전봉이었으나 3도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으로 불리게 됐다.

지리산의 삼도봉(날나리봉)이 전남북과 경남, 대덕산 전의 삼도봉(초점산)이 경남·북과 전북으로 불완전한 삼도인 것에 비해 온전히 도를 나누는 삼도봉이다.

 

정상에 1989년 10월 10일 세운 삼도봉 화합탑이 서 있는데, 삼도를 상징하는 거북과 용,검은 여의주로 만들었다. 지역 감정 타파를 위해 매년 10월 10일 삼도의 주민들이 모여 삼도화합제가 열리며, 삼도의 지방자치단체가 돌아가면서 주관한다.

 

이곳은 조선 태종 14년(1414)에 조선을 8도로 분할하면서 삼남의 분기점이 되었다 한다. 삼국시대엔 신라 백제가 격전을 치르며 세력균형을 유지했으나, 이후 역사가 흐르면서 삼도의 지리적·행정적 경계인 동시에 방언의 갈래길로 굳어졌다 한다.

 

[석기봉] 1242m

 

민주지산에서 유일한 암봉. 쌀겨처럼 생겼다고 하여 쌀개봉이라 부른 데서 석기봉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삼도봉(1,176m)을 시작으로 민주지산, 각호산과 함께 웅장한 서북 능선을 이루는 산군(山群)에 속한다.

 

[민주지산] 1241.7m

 

민주지산은 충북 영동,경북 김천,전북 무주등 3도에 걸쳐 있는 산으로 북으로 각호산, 석기봉,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8km의 주능선을 그리고 있다. 또한 1998년 4월 1일, 특전사 극기훈련 때 체온저하로 애석하게 6명의 대원들이 사망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민주지산. 4음절로 되어 있는 특이한 이름과 '민주'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흡입력으로 인하여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민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동국여지승람>에는 민주지산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白雲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이름은 충청도 쪽에서 바라 봤을 때 산세가 민두름(밋밋)하다고 해서 민두름산이라 불리던 것이, 일제시대 지도를 제작할 때 민두름산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사 한자인 민주지산(岷周之山)으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다른 설로는, 볼민(眠), 두루주(周). '두루두루 산을 볼 수 있는 산'이란 설이 있다. 민주지산 정상은 너무나 평이한 육산이다. 1,241m 높이의 산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덕유의 줄기를 시작으로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막히는 곳이 없다. 이 산은 주변의 산들이 높아서인지 석기봉, 삼도봉 너머의 산들도 전혀 가림이 없다. 덕유산. 마이산. 대둔산. 서대산. 속리산. 주흘산. 백화산. 황학산. 금오산. 가야산. 거망산. 그리고 그 사이의 크고 작은 이름 모를 산들의 물결. 어느 한 곳에 서서 이렇게 많은 산들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또 없을 것이다.

 

- 우리나라 산이름은 왜 백운산(白雲山)이 많을까

 

백두대간에 있는 함양의 백운산을 비롯해 전국에는 100여개의 백운산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한글학회가 발행한 ‘땅이름 사전’에만도 38개에 달한다.

 

白雲山은 보통 산이 높아 흰 구름이 늘 머물러 백운산으로 불리는데, 이는 단순히 한자를 풀이한 뜻이름이다.

白雲이란 이름은 한자의 음차에서 온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白)은 ‘밝’의 음차이고, ‘희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밝다’는 뜻과 직접 연관된다.

우리나라의 큰 산이나 명산에는 대개 白이나 朴이 붙는데, 이는 대부분 ‘밝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산 이름에 ‘밝다’는 뜻이 많은 것은, 옛사람들이 산을 인간세상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삼마골재]

 

경상북도 김천시,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 등 3개 도가 만나는 화전봉(삼도봉) 북쪽 자락에 있는 고개다. 삼마골재 고갯마루는 화전봉으로부터 900m 떨어져 있다. 고개 서편은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이며, 김천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가 된다.

 

삼도봉에서 황악산 방면으로 내려가면 삼마골재에 이르고, 이 고갯마루에서 오른쪽 골짜기를 삼마골, 즉 삼막골(蔘幕谷)이라 하고, 왼쪽 골짜기를 미나리골이라 한다. 민주지산 주능선 북쪽 골짜기의 여러 물줄기가 미나미골(미니미골)에 합류해 황룡사 일원을 흘러가며 초강천의 상류를 이루고 있는 계곡을 물한계곡(物閑溪谷)이라 이른다. (tistory 입산하는 사람들)

 

[밀목재]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의 가래점마을과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대야리 대야동마을 간을 왕래하던 고갯길로, 지금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면목재라고도 불린다.

 

물한리는 맑은 물이 끝없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대야리 마을은 원래 천지동(天地洞)이었으나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시골동네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면서 정정하라고 어명을 내리자, 하늘천의 한일(一)과 따지의 흙토변(土)을 없애 대야리(동)가 되었다 한다. 물한리에서 부항면으로 넘어가는 또다른 고개로는 백두대간 상의 삼마골재가 있다.

 

[석교산(화주봉)] 1195m

 

여지도서에 황악산은 추풍령-괘방령에서 와서 서쪽으로 석교봉-삼도봉을 일구었다. 하여 화주봉을 석교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질매재] 우두령 720m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다.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하여 우두령(牛頭嶺)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두 이름이 별개인 양 둘 다 표기돼 있다.

출처 : 밤송이
글쓴이 : 밤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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