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1614m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 하여 ‘덕유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날에 광려산(匡慮山), 여산(廬山)으로 불렸다.
이성계가 고려장군시절 이산에서 수도할 시절, 수많은 맹수들이 우글거리었으나 한 번도 해를 입지 않아 덕이 넘치는 산으로 덕유산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경상남도 거창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安城面)·설천면(雪川面)의 경계에 솟아 있으며, 북덕유산(향적봉)과 남덕유산(1,507m)으로 나뉜다. 주봉인 향적봉에서 시작해 남으로 중봉, 덕유평전을 지나, 무룡산과 삿갓봉을 거쳐 남덕유산에 이르는 장장 100리에 걸친 산으로 덕유산군으로도 불린다.
덕유산이란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금산군 편에 ‘안성소에 있는데 경상도와 안음현의 지경에 있다’고 했다. 안음현 편에는 ‘현 서북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전라도 금산국과 장수현의 경계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증환의 ‘택리지’에는 ‘덕유산은 흙산인데 구천동이 있고 천석(泉石)이 깊숙하다’고 쓰여 있다.
17세기 후반에 쓰여진 윤증의 ‘유광려산행기’에는 덕유산의 별칭이 ‘광려산’이며 ‘ 광려산은 금산군 안성현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안성현 쪽에서는 덕유산을 광려산으로 부른 것 같다. 이 책은 ‘구천동의 백련암에는 1백 명의 승려가 모여 독경한다’ ‘향적봉에 오르니 왼쪽에 가야산 오른쪽에 둔악(屯岳:어딘지 모름)이 있고 두류산(지리산)이 남쪽 하늘 끝에 가로 걸쳐 있다’ ‘동구(구천동 입구)는 철쭉이 다 져가는데 산 위에는 아직도 한창이다’ ‘수많은 봉우리는 개미둔덕 같다’는 등 덕유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 명종 때 광주목사를 지냈던 임훈은 그의 저서 ‘등덕유산 향적봉기’를 통해 덕유산의 주봉을 향적봉이라 했고, 이는 주목이 많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남덕유산이 황봉이고, 무룡산은 불영봉이라고 했다. 덕유산권의 사찰로는 직지사와 백련사, 송계사, 영각사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덕유산은 1975년, 오대산과 더불어 국내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태백산맥에서 갈라진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소백산, 속리산 등을 솟아오르게 한 후, 다시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 그 중심부에 빚어 놓은 또 하나의 명산이라고 할 수 있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와 장수, 경상남도 거창과 함양군 등 2개도 4개 군에 걸쳐 솟아 있으며, 해발 1,614m의 향적봉을 정상으로 하여 백두대간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13개의 대(臺), 10여개의 못, 20개의 폭포 등 기암절벽과 여울들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구천동 계곡은 예로부터 선인들이 이름 붙인 33경으로 덕유산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덕유산(1,614m)은 주봉인 향적봉을 중심으로 1,300m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장장 30여km를 달리고 있으며 그 가운데 덕유산 주봉을 비롯해서 동쪽에는 지봉, 북쪽에는 칠봉이 자리하고 있는데 덕유산은 덕이 많은 너그러운 모산이라 해서 덕유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덕유산국립공원 홈페이지>
계곡은 총 8곳이 있는데, 특히 북동쪽 무주와 무풍 사이를 흐르면서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南大川)으로 흘러드는 길이 30㎞의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소다.
남덕유는 암봉 의지형에 날카롭다면 북덕유는 전형적인 육산으로 매우 유순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중환의“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흙산인데 九泉洞이 있고 천석이 깊숙하다.
난리를 격을 때 이산에 숨어들면 적군이 찾지 못한데서 “덕이 큰산” “넓고 크다” 라고 하였다.
또한 임훈의 “덕유산향적봉기”에는 무주구천동을 불공을 이룬자 9천명이 머문 둔소라 했고 박문수어사가 천(千)씨 부자와 관련해 구천동민을 신도로 다스렸다. 구(具)氏와 천(千)氏가 많이 산다고 해서 具千洞이라 한다고 하는 말도 있다.
백암봉-중봉-향적봉의 덕유평전과 주목, 향적봉에서의 조망은 매우 훌륭하며, 설경산행은 최고의 백미!! 그러나 향적봉은 대간길을 벗어나 있다.
[육십령] 734m
육십령 -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도 하는데, 소백산맥 중의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전주~대구 간 26번 국도가 지나간다. 예부터 함양-장수 주민들의 물류를 교환했던 고개라고 한다.
1.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의 거리가 60리(24km)이고 장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도 60리(24km)라고 하여 육십령.
여암 신경준의 山經表 에는 "六十峙"- 南來 安義西六十里 長水北四十里 라고 쓰여있다.
즉 안의 서쪽 60리, 장수 북쪽 40리에 "육십령"이 있다는 뜻이다.
2. 이 고개를 넘으려면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어 육십령.
3. 옛날엔 이 고개에 산적들이 많아서 60명이 모였다가 올랐다는 이야기인데,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 양쪽 산아래 마을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밑에는 장정들이 모여 있던 주막이라 해서 장군동(壯群洞)이 있고, 산적을 피해서 살다가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해서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어
세 번째 이야기가 신빙성이 높다.
4. 박정희 대통령은 군장동 사람들에게 산 속 군장동에 살지 말고 길가에 나와서 살라고 흙벽돌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고갯마루 연립주택식으로 지어진 하얀색 집들이 그때 박 대통령이 지어준 집들이다.
군장동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이 그때부터. 육십령마을이 군장동 사람들에게 새 삶의 터전이 된 것도, 고개이름이 육십령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한다.
[장수 경주마 목장]
할미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장수마을에 위치. 46만평 규모의 우리나라 내륙 최대의 말 목장.(한국마사고교)
경주마 생산 농가를 위해 우수 씨수말의 무료 교배 지원 사업을 펼치게 되는데, 지난해 40억 원에 도입된 씨수말 '메니피'의 무료 교배도 이미 시작됐다. 또 국내산마들은 앞으로 이곳에서 경주마가 되기 위한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다.
[할미봉] 1024m
지도에 이름은 없고 높이만 표시되어 있다.
1. 할미봉 아래에는 성터가 있는데, 할미봉의 이름은 이 성터에서 유래한다.
옛날 어느 할머니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 성을 쌓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할미봉이라 했다는 것.
2. 그러나 할미봉 서쪽 산자락에 있는 반송 마을 사람들은 할미봉이 원래 ‘쌀미봉’인데 할미봉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조선 시대 때 이곳에 합미성이 있어 합미봉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1961년 국토지리정보원 지명일람표에는 합미봉으로 고시)
3. 옛날 한 도승이 할미봉 정수리의 암장을 보고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형상이라 했다
하여 합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한다.
[대포바위]
할미봉의 턱밑에 위치. 임진왜란 때 장수를 치기 위해 육십령을 넘던 왜군들이 대포바위를 조선군의 대포로 착각하여
함양으로 우회해 남원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장수군 일원이 피해를 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가까이 보면 남자의 성기와도 비슷하여 남근석으로 불리는데, 남자 아이를 못 낳는 여자가 이 바위에 다가와 절을 하고 치마를 걷어 올리면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장수덕유산 (서봉)] 1492m
옛날에는 남덕유산 또는 서봉을 봉황산(봉황산) 이라 하여 매우 신성시 했다.
문헌비교와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은 대덕산을 경유 덕유삼봉-백암봉-봉황산을 거처 육십령으로 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남덕유산인지 장수서봉인지 가늠할 필요가 있다.
[남덕유산(동봉)] 1507m
지리산 다음으로 크고, 넉넉하고 덕이 있는 덕유산이며, 덕유산의 연봉들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덕유(德裕)산에 남녁 남(南)자를 붙인 이름이다.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 일대를 북덕유산, 장수군에 있는 서봉을 장수덕유으로 일컫는다. 장수군 지역에서는 장수덕유산을 5대 명산의 하나로 꼽고 있다.
덕유산하면 북쪽의 북덕유산과 주봉인 향적봉, 그리고 무주구천동의 33경만 생각하기 쉬우나 장수덕유와 이곳 남덕유산까지 덕유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남한에서는 지리산국립공원 다음으로 웅장하고 넉넉한 산이다.
덕유산의 한 봉우리는 무주에서 시작되고, 또 한 봉우리는 장수에서 일어나는데, 장수의 봉우리를 남덕유산이라 하며, 무주의 봉우리를 북덕유산이라 한다.
남덕유산은 대간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이 산하에 와서 산을 보고는 크고 덕이 있는 산에서 싸울 수 없다 하여 퇴군했다고 전해진다.
[참샘]
남덕유산의 산상에 있는 샘으로,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온수이고,
여름에는 손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찬물이 솟아난다. 남강의 젖줄, 여기서 발원되다 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외에도 남덕유산은 3대강의 발원샘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육십령은 금강의 발원샘, 북쪽 바른 골과 삿갈곳샘은 낙동강의 지류 황강의 발원샘이다.
[월성재]
아래 ‘월성리’라는 마을이 있다. 월성(月星)은 달이 마을 앞 성삼봉(城三峰)에 비친다 하여 월성(月城)이었던 것이 달(月), 별(星) ‘월성’으로 바뀌었다.(거창군 북상면 홈페이지)
[삿갓봉] 1418m
삿갓모양을 하고 있어 삿갓봉이라 불렸고, 골재는 무룡산과 삿갓봉 안부를 이루어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개다.
[삿갓(골)재 대피소] 1280m
삿갓재 대피소는 2층으로 된 최신식 건물이다. 1층에는 보일러실과 취사장이 있고, 2층에 숙소가 있다.
등산객들은 1층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2층에서 숙박을 해결한다.
숙소는 2층 침상으로 되어 있으며, 총 7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용료는 1박에 비 성수기 7000원, 성수기 8000원 이며, 침구류(담요) 대여료는 1장에 1000원이다.
숙소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라면이나 과자류 등 인스턴트 식품을 판매하며 캔이나 음료수 건전지 휴지 등 꼭 필요한 물건만을 판매한다.
사고를 우려해 술은 일체 팔지 않는다. 밤에는 심야전기를 이용해 난방을 하기 때문에 방의 1층은 따뜻한 편이다.
(2층은 1층의 열기로 난방을 하기 때문에 새벽에는 무진장 춥다).
[무룡산] 1492m
백두대간상의 남덕유산과 북덕유산(향적봉)을 이어주는 산.
용이 춤추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삿갓재 대피소에서 내려가는 길인 황점마을은 용의 꼬리에 해당한다.
황점은 옛 이름이 삼천동(三川洞)으로, 조선조 때 쇠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한다.
유황을 많이 구웠다는 데서 황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유독 ‘봉’이 아니라 ‘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가림봉]
남덕유8.6km/향적봉(대피소)6.2km 지점. 돌탑모양의 큰돌과 돌무리가 쌓여 있어 흔히 돌탑봉이라 하는데
누군가 이정표에 가림봉이라 표시를 해 놓은 뒤 가림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자료에는 대기봉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동엽령] 1320m
덕유산의 옛 고개 중 동엽령(冬葉嶺)은 깊은 산중에 있는 덕에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겨울 잎'으로 해석되는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일대에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기가 어렵다.
무주와 동엽령을 마주하고 있는 거창군에서 동엽령을 '동업이재'로도 부르는 것을 보면 이런저런 짐작을 해볼 수는 있다.
거창군이 발간한 '거창군사(居昌郡史)'는 동엽령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토산품을 교역하기 위해 넘나들던 재이다.
재로 오르는 병곡 대하골(현재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에는 옛날 동업이재를 넘나들던 나그네를 위해
술을 빚어 팔았다고 하는 주막터가 있다.'
[백암봉] 1490m
안성방면으로 하얀 암봉을 내리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안성 방면으로 피라밋처럼 삼각형으로 솟아오른 가새봉이 그 아래 망봉까지 지능선 꼬리를 늘어뜨리고 서있다. 향적봉과 중봉, 덕유평전의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서 덕유산의 한가운데이다. 대간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꺾어졌다가 북향하고, 남쪽으로는 지리산으로 뻗어내린다. 구천동으로 내려가려면 중봉 못 미쳐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오수자굴을 경유한다.
"흰바위봉"이란 뜻인데, 바위의 색이 엄격하게는 회색에 가깝다.
[귀봉] 1400m
횡경재에서 백암봉에 오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봉우리다. 구천동계곡의 끄트머리에 올라붙은 산이어서 계곡 전체를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다. 오수자굴이 북쪽 발아래에 위치한다. 모습이 기괴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종의 ‘귀신봉’이다
[향적봉과 무주 리조트] 1614m
향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향적봉이라 불렸다는 덕유산의 주봉 향적봉에는 무주 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덕유산 해발 1520m까지 곤돌라로 오를 수 있어, 이곳에서부터 정상 향적봉(1614m)까지는 20분 만에 갈 수 있다.
무주리조트는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일대 그야말로 덕유산 국립공원 심장부에 들어서 있다.
1989년 이곳을 집단시설지구 및 국민체육시설지구로 용도를 변경한 후 대규모 리조트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1990년 개장한 후,
1992년 당시 김영삼 대선후보가 이곳에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를 공약한 후 이듬해인 1993년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1,614m)인근 무려 90,000m2에 대해 자연보존지구에서 국민체육시설지구로 변경되었으며, 그 해 4월 김영삼 대통령이 동계유니버시아드 유치 약속을 하고 이에 따라 ‘국제경기지원에관한특별법’으로 이곳 국공유림 임대를 허가 했으며 국제대회 기준의 스키슬로프 확장을 위해 추가로 자연보존지구를 해제했다.
1995년부터 본격 공사를 시작 한 스키슬로프로 인해 총 200만m2가 훼손되었다.
이 슬로프 공사과정에서 이식 대상이었던 나무들 가운데 주목과 구상나무의 이식 후 현재의 실태를 보면 얼마나 무성의한 이식이었으며, 그로인해 얼마나 귀중한 산림이 훼손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에서 자생하던 수령 300~400년 이상의 주목과 구상나무 256주와 70~80년 수령의 나무 113주 등 총 369주가 이식되었으나 이식 10년이 경과된 현재 구상나무는 단 1그루도 생존하지 못했으며 주목도 50%정도 생존되었으나 이 마저도 더 지켜보아야 할 상황이다.
이와같이 보호수종의 이식이 실패한 이유는 스키장 건설에 눈이 멀어 이식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7년 1~2월에 동계유니버시아드 개최에 맞추어 최소한의 이식준비 기간(토양안정, 충분한 복토, 기후 등)을 고려하지 못한 채 서둘러 바로 옮겨심은 결과 이같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현재 죽은 나무는 제거하지 않은 채 고사목을 빙자한 횡사목으로 그대로 남아있으며 5~6년생 주목을 보식하는데 그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얼마나 자연자원에 대해 무심하며, 덕유산이 스키장건설 하나 때문에 덕유산의 주요 식생대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으며 앞으로도 훼손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횡경재]
백련사에서 대간을 넘어 송계사와 교통하던 고갯마루다. 대간 상으로는 지봉과 귀봉 사이에 위치한다. 편편한 덕유평전이 눈앞으로 펼쳐지는데 키 큰 나무는 없고 군데군데 잡목군락만 뭉쳐지고 흐트러진다. 이름은 "가로 자르는 고개"라는 뜻이며, 대간에서의 시각이다.
백련사의 입장에서라면 "종경재’"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송계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원효와 의상이 652년(진덕여왕 6) 영취사(靈鷲寺)를 창건한 뒤 5개의 부속 암자를 세우면서 송계암이라고 이름 지어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 영취사를 비롯하여 5개의 암자가 모두 불탄 뒤 폐허로 있다가 숙종 때 진명(眞溟)이 송계암만을 중건했다.
6·25전쟁 때 다시 전소된 것을 1969년 중창했으며, 1995년에 원정(圓靜)이 1969년 중창 때 건립한 영취루가 기울어진 것을 해체하여 다시 짓고 문각(門閣)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지봉] 1342.7m
지봉 정상에는 못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봉(池峰)의 연못 ‘지’를 따서 우리말로 못봉으로 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월음재과 횡경재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로 옛날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움푹 패인 곳이 있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 서쪽 200m 지점에 있는 전망 좋은 봉우리와 혼동하는 경우가 흔하다. 향적봉이 서쪽 건너편으로 손에 잡힐 듯 버티고 서 있고, 그 아래 백련사가 울창한 송림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다. ‘연못이 있던 봉우리’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지봉’ 덕유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는 ‘못봉’으로 소개하고 있다.
[월음재(달음재)]
대봉과 지봉 사이의 가늘고 긴 능선의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북쪽의, 신대(덕유산)휴게소가 있는 구천동 구월담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과 만나는 갈림길이다. 남쪽 소로를 따라 내려가면 송계사계곡이다. ‘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고개’라면 필시 지봉의 그림자인데, 이것이 관찰되려면 백련사의 위치다. 아마도 백련사의 스님이 지어 붙인 이름인 것 같다. 우리말로는 ‘달음재’다.
[대봉]1263m
대봉에 오르는 길에는 싸리나무 군락이 있다. 서쪽으로 향적봉 주릉이 보인다.
[갈미봉] 1271m
덕유산의 정상인 향적봉에서 구천동계곡 건너 동쪽의 가장 끝봉인데 대봉에 가려 보이지는 않는다. 정상과 능선의 동쪽 경사면이 목장의 초지로 조성되어 있다. 갈미봉은 ‘가리(미)봉’이 변한 말이다.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처럼 우뚝하다는 의미다. ‘미’는 이름꼬리말(어미)이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빼봉] 1039.3m
갈미봉에서 신풍령까지 가는 길에 있는 봉우리다. 갈미봉에서 빼봉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경사가 급한 편이다. 빼봉은 표지석이나 표지판도 없는 아주 평범한 봉우리다. 이곳에 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이 있어 이곳이 빼봉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전국에 1만 6000군데 삼각점이 설치돼 있으며, 이들은 지도 제작, 지적 측량, 건설공사, 각종 시설물의 설치 및 유지 관리 등의 기준점으로 쓰인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빼봉 삼각점은 ‘무풍 438’호로 동경 127.4911, 북위 35.5146에 위치한다. 내려가다 보면 옛날에 집안에 심어 자손의 번창을 기원했다는 만지송을 만날 수 있다.
[빼재] 920m
빼재(수령 또는 신풍령)에 세워져 있는 『백두대간 안내비』 적힌 빼재의 유래.
『빼재』는 삼국시대부터 각 국의 접경 지역이었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많은 민관군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고 임진왜란 시 이곳의 토착민들은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다.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에 널리게 됐다고 해서 “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며 뼈재가 경상도 방언으로 빼재가 되었다고 한다...
험준한 산길을 넘나들던 시절 고개를 넘던 사람들의 재물과 목숨을 빼앗아 죽은 사람의 뼈가 산을 이루어 뼈재요,
이 고개를 넘나들던 주민, 사냥군 혹은 산적들이 동물 및 가축들을 잡거나 약탈하곤 하면서 뼈를 버려 둔 곳이라 하여 뼈재.
‘빼재’는 ‘추풍령’을 본뜬 ‘신풍령’이라는 휴게소가 고개 아래쪽에 들어서면서
‘신풍령’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나, 일제강점기에 고개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는 바람에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수령(秀嶺)」즉 빼어난 고개라는 뜻의 표지석이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옛 이름인 ‘빼재’로 불려지기를 원하고 있고 앞으로 이곳을 관통하여 뚫리는 터널
이름 또한 ‘빼재터널’로 불려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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