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고남산구간
[노치마을] 가재마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에 위치해 한 집안에서도 행정구역이 갈리는 곳이다. 그래서 주천 부엌에서 밥을 지어, 운봉 안방에서 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 역시 한 마을에서 낙동강과 섬진강으로 나뉜다.
이 마을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으며, 물맛 좋기로 소문난 노치샘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이 스님들이 판 것으로 여긴다.
6.25가 터지고 장티푸스가 돌 때도 이 샘물을 마신 사람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이 마을을 지나가는 대간꾼들만 일년에 4천여명. 노치마을의 당산 소나무에게 인사하지 않은 사람, 노치샘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백두대간을 지났다고 할 수 없다 한다.
蘆峙. 갈대 노, 언덕 치. 이 마을에는 갈대가 많아서 갈대마을로 불렸다고 한다.
갈대의 전라도 사투리가 ‘갈재’. 이것이 다시 가재로 된 것으로 보인다.
6.25때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모두 불태워졌던 아픔이 있는 마을. 마을 뒷산에는 삼국시대 축조된 노치산성이 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써 중요한 방어지역이었으며, 아영면 아막성에서 정령치 고리봉의 산성까지를 이어주는 기점이다.
- 노치마을에서 밝혀진 사실
백두대간 지리산 정령치(1172m)를 지나 고리봉(709m)아래 노치마을에서 백두대간 환경 대탐사팀은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대 이곳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백두대간과 지리산의 맥을 끊은 사실이 밝혀졌다.
행정구역상 남원군 주천면 덕치리(회덕마을과 노치마을이 합쳐짐)에 속하는 노치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덕음산은 남으로 고리봉을 연결하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데 노치마을을 지나 고리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에다 일제는 백두대간과 지리산을 인위적으로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곳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3~4m의 규모로 능선을 가로지르는 웅덩이를 판 후 이곳에다 돌로 만든 볼트형(여섯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2개 1조로 이를 연결할 경우 거대한 잠금장치가 되어 능선의 맥을 차단 함) 잠금장치를 하여 백두대간과 민족정기를 끊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돌은 2개 1조로 되어 있으며 두 개를 합칠 경우 가로 1,6m×세로 1.6m의 사각형이 되며 가운데는 둥근 원형이 되는 잠금장치이다.
일제가 이러한 방법으로 백두대간과 지리산 사이의 맥을 차단한 것은 이곳의 지형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부터 이곳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덕음산-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이곳은 지리산이 사람으로 비유하면 머리에 해당되고
이곳이 바로 목 부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바로 목 부위에 숨통을 옥죄는 거대한 석물로 제작한 잠금장치를 함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가 마을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능선을 가로질러 파헤친 후 그곳에 돌을 채워 넣는 작업을 시켰다고 말하고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석물은 능선의 주요 기가 흐르는 곳을 차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이를 ‘방죽’이라고도 부르며 ‘울대’라고도 부르는데 그 지점이 바로 사람의 목울대와 비유해 그렇게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1910년대부터 백두대간은 물론 한반도의 주요지점에 쇠말뚝을 박거나 인위적으로 길을 낸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정기를 차단했으나 이번에 밝혀진 것처럼 대규모로 거대한 석물장치를 이용한 것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흔적은 90년대 중반까지 존재하였으나 90년대 중반이후 이 지역에서 대규모 경지 정리가 이루어지면서 ‘울대’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이곳에서 나온 석물장치 5개만 수거되어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 신수일씨가 정원석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을 탐사단의 탐문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여원재]
왜구의 손길이 거쳐간 자신의 왼쪽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는 이 고갯마루 주막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자결한 이 여인의 원혼은, 고려말 우왕 때 이성계가 운봉과 함양 등지에서 노략질 중이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운봉읍 한복판의 황산으로 진군할 때, 백발의 노파로 나타나 승전의 전략을 일러주었다 한다. 왜장 아지발도를 무너뜨린 이성계가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놓아 이 고개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는 것.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 부른다.
여원재 남원쪽 고갯마루의 암벽에는 왼쪽 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있다고 하는데, 전설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성계와 지리산
지리산에는 이 밖에도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 몇 개가 더 전해진다.
조선 개국을 앞둔 이성계가 전국 명산에 기도를 올려 창업의 뜻을 물었는데 유독 지리산만이 반기를 들어 ‘불복산’이라 이름붙였고, 천왕봉 아래 중산리 칼바위는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 은거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장수에게 그의 목을 베어오라고 했다는 식이다.
사적 104호로 지정된 황산대첩비는 조선 선조 10년(1577년)에 세워졌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고, 지금의 비석은 1957년 새로 세운 것이다
[합민성] 641m
합민성(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은 남원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때 운봉 민보군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 일목장군 박봉양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운봉. 농민군이 패전하였다는 방아치와 관음치의 위치 또한 이곳 장치(방아치)와 합민성의 서북쪽 까막재(관음치)로 추정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린다.
- 동학과 남원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1894년 농민들이 활화(活火)하였던 동학농민혁명의 한 축은 김개남이라는 농민군 지도자가 맡고 있었다.
김개남은 그해 6월 하순에 남원시내 서쪽의 교룡산성에 입성하여,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군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9월 말 동학농민군 2차 거병 때 전봉준의 동시 출병요구를 거부하였다가, 10월 말에 이르러서야 공주회전(公州會戰)을 위해 남원을 떠났으니, 그 사이 약 4개월간 영남지역으로의 세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이 여원재를 넘지 못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농민군은 진주와 함양 등에서 원병을 받아 군세를 늘린 민보군(民保軍)과 이 여원재 인근 방아치와 관음치에서 두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모두 지고 말았다. 일어서면 온통 농민군의 흰옷이어서 ‘서면 백산’, 앉으면 농민군의 죽창만 보여 ‘앉으면 죽산’이라 했던, 1894 갑오년 3월 부안군 백산결집에서 보았던 그 농민군의 기세를 너무 과신했는지도 모른다.
김개남이 지휘하는 동민농학군 1만명이 외눈박이 박문달이 지휘하는 관군의 습격을 받아 농민군이 패퇴한 곳이기도 하다.
-남원의 환경 및 역사
전북 동남부에 위치,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할 뿐 아니라 수리시설이 잘되어 농업이 발달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수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어 관광도시로 각광을 받는다. 지리산의 서북 관문인 남원은 예로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라
했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에 전라도 남원은 벼 한 말을 심으면 140말을 추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전라감사를 지낸 김달순은 ‘기상풍영(沂上諷詠) 융중산수(隆中山水)’라 하여 ‘남원의 산천경계는 중국의 기수(沂水)와 같이 아름답고 사람들은 제갈공명이 때를 기다린 곳과 같다’고 극찬하였다.
마한의 54국 중 고렵국과 불운국이 남원 땅을 발판으로 삼았다. 신라 때 소경을 설치하면서 남원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남원부, 조선시대에서는 남원도호부와 남원관찰부를 설치하였다. 1981년 시로 승격되었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유명한 광한루와 오작교, 실상사가 있다. 황산대첩비와 남원성터, 교룡산성, 용담석탑, 원천폭포 등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
부패한 관아에 항거한 춘향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춘향제를 매년 5월5일부터 열린다. 1931년 춘향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낸 것이 춘향제의 시초였는데 전국 10대관광문화축제로 선정될 만큼 남원의 문화를 대표하는 향토축제로 자리 잡았다. 또한 흥부제는 인월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가 흥부전의 발상지로 고증되면서 ‘착한 사람들의 큰 잔치’란 주제로 1992년 처음으로 열었다. 흥부의 착한 마음씨와 형제애를 널리 본받기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는 날에 남원시민의 날 행사로 치러진다.
운봉지역은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신라 때의 옥보고라는 사람이 바래봉 북쪽 옥계동계곡에서 제자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다고 한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은 운봉의 화수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를 본격적인 창으로 발전시킨 대가들은 모두 송흥록의 제자들이었다. 수제자인 김정근은 ‘중고제’를 만들고, 주상환과 박유전은 ‘서편제’를 창시했다. 송흥록의 자손이자 판소리의 대가였던 송광록과 송우룡, 송만갑 등도 화수리에서 태어나 음악의 경지를 개척했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고남산] 846.4m
이성계가 황산벌 대첩을 하기 전,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여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
고남산 아래에 주둔할 때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 마을은 권세가 하늘에 닿도록 끊임이 없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
[통안재] 작은 독골재 670m
운봉읍 권포리에서 산동면 대기리 독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독골재에 비하여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란 의미이며, 동리 안 고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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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요마을]
이 마을은 원래 풍수설에 의하면 옛부터 말의 허리처럼 형국이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마(馬)자와 허리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고승 유정대사(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여 매화는 눈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이며 향기가 순결하여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지형과 인심에 합당하다고 한 후에 마을 이름을 지금의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남원시청 홈페이지)
말의 허리를 닮았다 하여 마요리였다가, 사명대사가 마을 사람들이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다 해서 매요리라 불렀다 고도 한다.
◆[유치재]
매요리와 가산리의 중간, 사치마을과 연결되는 삼거리다. 인근의 마을은 모두 남원이지만 유치재 자체는 장수군 지역이다.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간다. 유치재를 매요마을 서쪽의 언덕으로 표시한 지도는 착오다. ‘흐름고개’, 즉 경사가 거의 없는 고개라는 의미다. ‘버드나무 고개’로도 부른다.
[운봉읍 비전마을]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해 세운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이 인월과 이웃한 운봉읍 비전마을이다.
지명만 놓고 보면 언뜻 외래어처럼 들리지만 ‘비(碑)가 전해져 내려온 마을’ 혹은 ‘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해서 그러한 이름이 되었다고. 지척에 1000m 이상의 지리산 고봉들을 두고 있는 터라 황산(697m)은 그야말로 동네 뒷산 격이지만,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와 휘하 장수들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친 역사적인 곳이자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마을이기도 하다.
당시 왜장은 아지발도였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어 섣불리 죽일 수 없었다고 한다.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렸지만 키가 7척에 힘이 장사라 온몸을 무거운 무쇠갑옷으로 두른 탓에 불사신과 같았다. 그를 죽이려면 화살을 이용해 얼굴의 급소를 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름도 그의 본 이름이 아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 ‘아리’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이고, ‘발도’는 용맹하다는 뜻을 지닌 몽고말이라고 한다. 날이 저물고 그믐밤인데다 피아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아지발도도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이성계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지라 하늘을 향하여‘천지신명이시어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 같은 밤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같이 비추어 주었다. 깜작 놀라는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이 달빛에 훤이 빛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원수 통두란으로 하여금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게 했다. 그 화살이 어김없이 투구를 날리자 아지발도는 벗겨지는 투구의 끈을 입으로 잡으려고 얼른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이성계의 화살이 이번에 아지발도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관통한다.
결국 아군보다 왜구의 수가 10배가 많았지만 모두 섬멸되었고 아지발도가 흘린 핏자국이 지금도 황산 광천에 있는 피 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인 것이다.
지금도 운봉 토박이의 열 가운데 아홉은 읍장 이름은 몰라도 아지발도는 다 안다고 한다. 거의 ‘아스팔또’에 가까운 발음으로 기억하는 그 어린 왜장 이름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아예 귀에 박힌 탓이다.
이 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고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사치재] 498m
620봉과 618봉 중간인데 현재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서는 유정리 사치마을이고, 동은 인월면 아곡리다. 88올림픽고속도로 밑에 통로가 있으므로 고속도로를 횡단하여 대간길을 간다는것은 위험하다. 유치마을에는 장수시내버스가 들어오고, 아곡리에는 남원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동쪽 1Km 지점에 88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가 있다. 사치재의 뜻은 "모래언덕 고개" 라고 한다. 이 지역은 암릉은 전혀 없고 고속도로 주변과 사치재 아래로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풍수설에 의하면[飛雁落沙비안낙사] 기러기(雁)가 모래밭에 앉은 형국이라 한다.
[새목이재]
시리봉과 693봉의 중간에 허리를 낮춘 곳이다. 남동쪽 임도와의 사이에 샘터가 있으며 아영면 아곡리 남쪽 2Km 지점, 88올림픽고속도로 옆에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논곡리 꼬부랑재로 넘어가는 임도는 차량통행이 불가하다. 새목이는 ‘새의 목’에 해당되는 고개라는 뜻이다.
[아막성]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운봉은 신라 때 모산현이라 하였으며 따로 이 아막성(阿莫城), 아영성(阿英城), 경덕(景德), 운성(雲星)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운봉은 신라 후기에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에 백제의 군사기지는 남원에 있고, 신라의 군사기지는 모산(雲峰)에 있어 이때 신라는 백제를 막기 위해 수정산성(水晶山城), 준향산성(準香山城), 합민성(合民城) 가산산성(佳山山城), (성리산성)城里山城의 여러 성을 두었고 백제는 운봉 가산으로부터 정령치에 이르기까지 이중으로 순라로(巡羅路)를 설치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두 나라 사이에 국경분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아막산성은 옛날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렀던 곳으로,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백제 무왕3년 4만의 백제군사가 이 곳에서 신라군에게 전멸당했다고 한다. 성 둘레는 약 630여m에 이르고, 성주변에서는 기와조각과 백제 토기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북문지와 수구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동쪽에 직경 1.5m의 정호지가 있다 (전북지방 기념물 제38호).
모산성은 삼국사기에서 아막산성(阿莫山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운봉으로, 신라 때 모산현 또는 ‘아영성(阿英城)·아막성’이라고도 적었다.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인 운봉의 옛이름은 지금도 땅이름에 널리 쓰이는 ‘아막’이란 말과 잇닿아 ‘아막골/아막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복성이재] 550m
기인 변도탄이 天氣를 보니 삼년내에 국가에 큰 전란을 예시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 하여 삭탈관직을 당하고 전란을 대비,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북두칠성 중에 복성이 남쪽으로 비처 별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하는데 복성별빛이 멈추는 지라, 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움막을 지었다 하여 복성이재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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