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산] 985m
동으로 진밭산, 동구지산, 덕대산 등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흥덕리의 깊은 계곡이 펼쳐져 있다.
삼성산 유래 ~
성스러움을 뜻하는 산 이름이다.
산경표에 '삼성산(三聖山)이라 기록되었고, 주변에 이를 뒷받침 할만한 지명들이 있다.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周禮里)에 '주공'이란 마을이 있다. 1790년 곡부공씨가 이 마을을 개척했는데 공자가 살던 주나라 주(周)와
자신의 성 공(孔)자를 따서 주공(孔周)이라 불렀다. 공자는 중국의 삼성(三聖) 중 한 명으로 꼽는 인물이다.
삼성산 남쪽의 대성리(大聖里)도 같은 지명이다.
1750년 이씨, 박씨, 김씨, 세 선비가 조용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찿아 개척했다.
이 마을에 평소 자신들이 존경하고 있던 중국의 성인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자동(孔子洞)'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대성리'란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삼성산 북쪽 기슭에 삼성암(三聖庵)이 자리잡고 있다.
직지사 말사로서 이 암자 현판에 천덕산 삼성암(千德山三聖庵)이라 적혀있다.
삼성암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금오산 '약사암 중수기'에는 이 석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설에 지리산에 세 분의 석불이 있었는데 삼형제 부처라 불렀다. 하나는 금오산 약사암에, 또 하나는 직지사 삼성암에, 다른 하나는 이곳(지리산)에 모셨다"
◆[여정봉] 1030m
여정봉(旅程峰: 1030m)
여정봉은 특징 없는 봉우리다. 정상을 알리는 작은 팻말과 선답자의 리본만 매달렸을뿐이다.
여정봉 정상에서 우측으로 90도 꺾이는 내리막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백두대간 복원지
여정봉을 떠나서 내려서면 긴 의자와 이정표, 알림 표지가 설치된 지점이 나온다.
여기서 좌측 사면으로 내려서면 목장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백두대간의 복원지를 지나가게 된다.
과거 폐초소 등의 군사시설로 망가져 있던 백두대간을 최근 다시 원상으로 복원해서 본래의 모습으로 고친 것이다.
◆[바람재] 810m
바람이 불 때면 사람이 날아갈듯 많이 분다 해서 바람재.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찾는 곳이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겨우 올라 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그들이었다.
발을 들여놓기 곤란할 만큼 망가진 데다 쓰레기투성이가 된 콘크리트 방카를 유산으로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산을 올라와 몇 시간씩 머물고 돌아간다고 한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쟁이 치러질 때면 봉우리에는 어김없이 미군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유고내전이 한창이던 때에는 아예 며칠씩 상주하기도 했다.
그들의 성능 좋은 무전기로 유럽까지 교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종주해 본 산꾼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남으로 우두령에서 북으로 궤방령까지 긴 산길에서 유일하게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목장까지 있어 산꾼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돼 온 탓이다.
해발 870m의 21만여평의 목장은 94년에 모습을 갖추었다.
겉으로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지만 목장에서 한국 축산업의 현주소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형제봉,兄弟峰] 1040m
신성봉 갈림길을 떠나서 능선을 따라 몇 번 오르내리면 이정표뿐인 형제봉(1040m) 정상에 도착한다.
황악산 직전의 봉우리로서 비로봉과 함께 형제처럼 나란히 솟아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악산] 1111m
형제봉에서부터 황악산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하지만 부드럽다. 비록 ‘악(岳)’ 자가 붙었긴 했지만 산세는 지극히 순한 육산이다. 그래서인지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돼 있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렀다고 하며 지도상에도 흔히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택리지 같은 문헌 및 직지사의 현판에 ‘황악산’으로 적혀 있는 걸 보면 황학산은 분명 오기인 듯하다.
굳이 ‘岳’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자면, 북에서부터 내려오는 대간의 줄기가 속리산에서부터 이렇다 할 산을 솟구치지 못하던 차에(속리산에서 황악산 사이에 1,000m가 넘는 산은 하나도 없다.) 1,111m나 되는 산을 만나고 보니 당연히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또한 이 산이름의 첫 글자인 황(黃)은 오방색(五方色) 중 가운데를 나타내는 색인데, 옛 사람들도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명명했을 것 같다. 실제로 황악산은 삼면 바다를 기준으로 봤을 때 한가운데에 있다.
◆황악산 유래
예전 학이 많이 찿아와 황학산(黃鶴山)이라 불렀다 한다.
직지사 현판과 택리지(擇里志)에는 황악산(黃岳山)으로 표기되었고, 산경표에도 '황악산(黃岳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1111m)을 중심으로 형제봉, 신선봉, 백운봉, 운수봉 등 다섯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직지사(直指寺)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피라밋 모양의 육산으로 직지사 부근을 제외하고는 소나무가 드물다는 임상적 특징이 있으며 단풍과 설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황악산 직지사 유래]
황악산(黃岳山)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황악산에 자리잡은 직지사는 예로부터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 화상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아도 화상이 일선군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라 이름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백운봉]
황악산의 동봉(東峰)이자 직지사 백련암의 배후에 자리한다. 황악산의 일봉이지 독립 봉우리는 아니다. 경승지인 능여계곡이 가장 잘 관찰되는 위치에 있다. 이곳에서의 ‘백운’은 일반명사에 가까운 고유명사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백운봉 유래
백운마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진다. 140여년 전 황악산 중턱에 마을이 생겼는데 항시 구름이 덮혀 있어 '백운'이라 불렀다.
이곳에서의 ‘백운’은 일반명사에 가까운 고유명사다. 또한 박달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팔아 생활을 해왔다고 하여 이 마을을 '박수점'이라 부르기도 했다.
산 중턱에는 직지사 말사인 백련암(白蓮庵)과 운수암이 자리잡고 있다.
◆[운수봉] 680m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다.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이 대항면 운수리이므로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황악산 자락에 딸려 있는 조그만 봉우리인데 각종 이름에 차용된 것이 의아스럽다. 산 이름에 ‘물 수(水)’자를 쓰는 특이한 곳이다. 정상은 암장이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雲水峰.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운수봉 유래
운수동(雲水洞) 마을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천덕산(千德山)이란 다른 이름도 있다.
200여년 전부터 직지사를 찾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근처 골짜기에 정착해서 마을을 형성해 터목이라 불렀다. 한자로는 대항(垈項)이라고 표기했다.
면사무소가 이곳에 생겨 면(面) 중심지로 본리(本里)라 불렀으나 1914년 일제 때 본리와 돌모리, 백운동(박수점)을 통합해서 '운수동'으로 개명했다.
운수(雲水)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본디 이름인 터목이야 말로 삶의 터전이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시골산] 620m
현재 대간꾼들 사이에 여시골산(620m)이라 불리는 산은 운수봉과 괘방령 사이의 대간 상에 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오른쪽 가지줄기의 385.4m를 여시골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여시골산이라는 이름은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된 듯한데, 과거 이 산에 여우가 많이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간 등마루 위 오름길의 시작 부분에 여우굴 같은 동굴이 있다.
◆여시골산 유래
운수봉과 괘방령 사이의 대간 능선에 얹힌 봉우리다.
어떤 지도는 대간 오른편으로 가지쳐 나간 385.4봉을 여시골산으로 표기한 것도 있다.
지명 상으로 혼돈이 생기겠지만 어쨌든 대간 상에 걸친 봉우리에서 정상석을 만났으니 이곳을 여시골산으로 취급한다. '여우'를 경상도 사투리로 '여시' 또는 '야시'라 부른다. 이 산에 여우가 살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대간길 능선에서 여우굴 같은 동굴을 만난다.
◆[괘방령] 357m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을 잇는 977번 지방도로 위에 있는 고갯길.
이곳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괘방령이라 불리고 있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을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거는 ‘괘방(掛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고개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추측도 후대의 의미 부여이기가 쉽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 표기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掛榜이든 卦方이든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궤방’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오기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비록 이곳이 해발 300m의 낮은 고개이지만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의 정기가 잠시 숨을 고르다 황학산으로 다시 힘차게 뻗어 오르는 곳이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여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괘방령 유래
산경표에 '계방산(桂榜山)으로 표기됐고, 금산(지금의 김천) 서쪽 10리에 있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卦方嶺'(괘방령), 현 고개턱의 안내문에는 '掛榜嶺'(괘방령)이라 표기하였다.
지금은 이 고개가 한가로운 길로 변했지만 과거엔 꽤나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관로(官路)인 추풍령과 달리 상로(商路)로 쓰였는데 과거길의 선비들이 대분분 추풍령을 기피했다고 한다.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낙제를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 합격의 방을 걸어두는 ‘괘방(掛榜)이라는 것에 더 집착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대로 내려와서 고개 이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실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괘방령 산장]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던 산장 부부가 가정집으로 지으려다가 산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장 아닌 산장이 되었다 한다. 부부가 손수 3년여 공사 끝에 2007년 11월에 완공. 아직 대간길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산꾼들의 발걸음은 적은 편이지만 한번 다녀간 사람은 산장 부부의 넉넉한 인심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한다.
대간 상에 많은 산장이 있지만 대간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이용하기가 힘들지만 괘방령산장은 대간길과 접하고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다. 아들 백두산이와, 젊은 시절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였던 괘방령 산장 주인과 부인이 산다.
◆[가성산 柯城山] 716m
인근 주민들은 '가재산'이라 불렀다.
김천 쪽으로는 가성마을과 외가성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장군봉] 625m
가성산 바로 건너 산이지만 깊게 내려갔다 올라가야 한다. 가성산 정상을 넘으면 오른쪽으로 김천공원묘지로 가는 길과 왼쪽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몇 십미터 나가서 큰 바위를 왼쪽으로 돌아 밑으로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면 장군봉이고, 장군봉을 넘어서 계속 오르면 눌의산 직전 663m 봉우리다. (blog.daum.net/simbbochlmji)
장군봉은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長君이라고 함. 그래서인지 유난히도 신갈나무 무성한 부드러운 육산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음.
장군봉(長君峰)
한자로 將軍峰이 아닌 長君峰이다.
왕자(王子) 중에서 최고 연장자를 장군(長君)이라 부른다.
663봉 우측의 국사봉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기록이 없어 유래를 알 수 없다.
◆[눌의산] 743m
추풍령 남서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다. 직선거리로 2Km밖에 안 된다. 정상에 헬기장이 있고 낮은 구릉지에는 포도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서쪽에서 접근하여 북쪽과 동쪽으로 돌아서 남쪽으로 향한다. 추풍령에서 벌판이나 다름없는 화령지역은 그 성질을 다하고 눌의산 이후로는 덕유산권이 시작된다. ‘어눌하게 생겼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결코 어눌한 모습이 아니다. ‘訥嶬山’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봉화산' 또는 '선계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던 자리라서 봉화산, 신선이 도포를 걸친 모습이라서 선계산으로 ...
눌의산은 추풍령 뒤꼭지에 올라앉은 산이다.
대간꾼들이나 이 능선을 지날 뿐, 직접 이 산을 목표로 오르는 이가 드물어 대채로 한갓지다
추풍령을 지나면서 누구나 차창 밖으로 또는 휴게소에 들러서 흘깃 쳐다보기만 할뿐, 남한의 한가운데인 이 산을 올라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를 비롯해서 4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모두 한데 몰려 눌의산 발치 아래에 놓여있는 추풍령을 지나간다.
눌의산(訥誼山)은 얼른 그 뜻이 와 닿지 않은 별난 산명(山名)이다.
한자의 뜻으로 정의(情誼)가 눌하다 혹은 더디다는 것이니, 추풍령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경상도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쯤으로 해석된다.
눌의산 정상석이 놓인 곳은 옛날 봉수대가 있던 자리이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눌이항(訥伊項), <동국여지승람>에는 눌이항산봉수(訥伊項山烽燧)라 기록됐다.
따라서 '눌의'의 의(誼)는 이(伊)가 개변된 것이고, 항(項)은 목을 가르키는 것으로 유사음으로 풀이하면 본디 이름은 '눌이산'이다.
즉 '눌이산'은 '늘이목' 혹은 '늘잇재'가 되어 느릿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추풍령은 해발 고도가 225m밖에 안 된다. 경상도와 충청도 사이의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죽령(689m)이나 조령(642m) 등의 이름난 고개들에 비하면 훨씬 낮을뿐더러 김천시의 고도가 해발 100m에 이르고, 그 너머 황간 쪽은 추풍령 마루턱 높이를 거의 유지하면서 넌지시 기울 뿐이니, '늘잇재'라는 이름은 산이름 이었다기보다는 추풍령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추풍령 뒤쪽에 자리 잡은 산으로 등산인 들의 발길이 뜸해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이 산의 이름인 `눌의'는 한자어로 정의가 눌하다 혹은 더디다는 뜻이니 추풍령 영마루를 이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양쪽 인정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을 뜻한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주변 조망이 뛰어나다. 또한 옛날에는 요긴한 거점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라에 긴급을 다투거나 외적이 침범했을 때 활활 타는 봉화를 피워 올려 제몫의 역할을 다했을 눌의산의 늠름함이 살아 있다.
[은편리(銀片里)]
이 마을은 본래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전 영·정조 연간에 형성되어 음변(陰邊)리라 불렸고, 1759년 경상도 금산군 황금소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충북 영동군에 편입되면서 마을 이름도 은편(銀片)으로 개칭하였다. 1991년에는 황금면을 추풍령면으로 변경하여 현재의 행정구역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은편리로서 50여호의 부락으로 오늘에 이른다. 마을 뒤쪽에는 느름산이 높이 솟아 거센 한풍을 막아주고 겨울에 흰눈이 마치 은가루를 덮은 듯하다 하여 음변리를 은편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우측의 당산 위에는 수령 500년을 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느름산 정상에는 통신수단으로 사용했던 봉화대 옛터가 남아 있어 애환과 오욕 속에 흘러간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니 이 고장의 자랑으로 손꼽을 만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 마을 사람들은 씩씩하고 단합이 잘 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인심은 변함없이 넉넉하고 순박하여 사철 마르지 않는 느름산 물이 좋아 장수하는 마을로도 이름이 높다.
추풍령(秋風嶺)
본래는 추풍(秋豊)이라해서 풍요로움을 뜻하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추풍(秋豊), 또는 추풍역리(秋豊驛里)라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령(嶺)자를 붙여 고개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윤두서(1668~1715)의 <동국여지지도>와 그보다는 150년 뒤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대동지지>의 기록이 처음이다. 그로써 보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추풍령(秋風嶺)이란 이름은 대개 임진왜란 전후로부터 알려져 온 게 아닌가 싶다.
1905년 추풍령에 철도가 개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넘나드는 관문으로 조령보다는 추풍령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교통의 요지로서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군사적 요충지로도 이용되었다.
◆[금산] 370m
채석장 개발로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진 산으로, 자병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지역으로 꼽힌다. 일제 때 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 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 다음에는 고속 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아졌다. 앞으로도 10년 이상은 자갈을 채취할 수 있다고 하는데, 현재 작업장에서 50여 떨어진 곳에 채석장을 하나 더 낼 준비를 하고 있다. 경부고속철에 자갈을 납품하고 있어, 고속철 보수 연한이 끝날 때까지 채석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것.
채석이 끝나면 공사중 나온 폐석과 모래, 토사를 절벽 앞에 계단식으로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산을 복구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지만, 이들이 채석장 동북 사면에 시범적으로 심어놓은 묘목들은 대부분 푸슬푸슬한 모래땅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고사 직전이다. 현재는 채석을 중단하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를 하고 있다.
(출처 못 찾음. 비슷한 기사 자료 찾음. ↓)
[백두대간] 곳곳 채석장...폭약에 추풍령 허리 날아가..
충북 영동군 추풍령(해발 221m). 설악산과 태백산, 소백산을 거치며 숨가쁘게 내달려온 백두대간은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덕유산(1594m)과 지리산(1915m)으로 달려나간다.
그러나 추풍령 고개에는 구비구비 이어지는 산줄기 대신, 산 절반이 톱으로 썬 듯 잘려나간 절벽만 가파르게 서 있다.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추풍령 금산 채석장은 온종일 산을 부수는 발파음과 크러쉬어(crusher· 암석을 자갈로 잘게 부수는 기계) 굉음으로 두 귀가 멍멍했다. 아찔한 벼랑으로 변해버린 산 정상에는 어느새 인적이 뜸해진 백두대간 종주로가 벼랑과 평행선을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뻗어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추풍령면 이한욱(57) 면장은 『소음과 먼지는 물론, 마을 뒷산 절반이 날아가 경관 파괴가 엄청나다』며 『애초에 경운기라도 몰고나가 산을 파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라고 했다. 노모(47)씨는 『장마철마다 반쪽 밖에 안 남은 산이 무너질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무소 측은 오히려 현재 작업장에서 50여 떨어진 곳에 채석장을 하나 더 낼 준비를 하고 있다. 68년부터 30여년째 현장 지휘감독을 맡고있는 조규태(54) 소장은 『경부고속철에 자갈을 납품하고 있어, 고속철 보수 연한이 끝날 때까지 채석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사무소 측은 『채석이 끝나면 공사중 나온 폐석과 모래, 토사를 절벽 앞에 계단식으로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산을 복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4월 채석장 동북 사면에 시범적으로 심어놓았다는 묘목들은 대부분 푸슬푸슬한 모래땅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채 고사 직전이다.
백두대간보전회 충남지부장 유재호(47)씨는 『백두대간 마룻금을 잇는 금산이 이미 절반 이상 파괴돼 백두대간 줄기가 끊기기 일보직전』이라며 『새 채석장까지 들어서서 맥이 완전히 끊기기 전에 개발을 중지하고 복구대책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추풍령을 지나 높고 넓게 치솟은 덕유산 산줄기가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육십령(734m) 고개 역시 채석장으로 무참하게 훼손되고 있다. 경남 함양군과 전북 장수군이 경계를 맞댄 육십령은 『산을 넘는 동안 산적 60명을 만난다』는 전설이 내려올만큼 숲이 울창하던 곳. 동사면에는 남강 최상류 계곡이, 서사면에는 금강 최상류 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육십령은 태을산업과 함양석재 등 골재회사들이 낸 대형 채석장으로 흉칙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태을산업과 함양석재는 각각 지난 90년과 89년부터 육십령 정상부위에 6만1886㎡(1만8720평), 2만8568㎡(8640평) 규모의 채석장을 내고 도로공사용 골재와 건축용 석재를 채굴하고 있다.
폭약으로 산을 쪼개는 발파음과 크러쉬어 굉음, 주변 산야를 뒤덮는 먼지는 육십령도 추풍령 금산과 마찬가지였다. 채석장이 생긴 직후부터 태을산업 채석장 바로 앞에 자리잡은 서상면 황남리 주민들로부터 『덤프트럭이 비포장 진입로를 달리면서 생기는 먼지 때문에 하우스 농사에 피해가 막심하다』는 민원이 그치지 않았지만, 태을산업은 지난 97년에야 진입로를 포장했다.
지난해 환경부는 백두대간 마룻금을 중심으로 양쪽 700 를 「생태축」으로 지정했다. 백두대간이 훼손되고 있다는 환경단체 원성에 밀려 정부가 「이것만큼은 지켜야한다」고 내세운 「최소」 범위다. 그러나 아예 산 정상에 버젓이 자리잡은 육십령 채석장에 대해 함양군청은 『허가 당시엔 「백두대간」 개념 자체가 없었다』며 『법대로 해서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말했다.
(조선일보2000.05.25/최순호기자)
[사기점 고개] 390m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난함산] 733.4m
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난함산(卵含山)은,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돼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이라 표기돼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그러나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이다.
현재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무선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 중계소였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자가 묘(卯)로 오식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월간산/2005년7월호)
[작점 고개] 능치재 340m
성황뎅이 고개, 여덟마지기 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다. 작점고개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 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뒷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국영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년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영동쪽의 작점 마을이 김천쪽의 능치 마을보다 가깝긴 하나 이 고개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은 영동이 아니라 김천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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