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구간...
[지리산] 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 지리산에 관하여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지명>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역사>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반란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다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반란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동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문화 및 인물>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란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
- 지리산 이름의 뜻 -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이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 지리산과 역사적 인물
지리산은 경남의 산청, 함양, 하동군과 전북의 남원시, 전남의 구례군에 걸쳐 있으면서 오만 가지 삶을 아우르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 20여 개가 펼치는 산자락 둘레만도 800여 리에 이르는 산답게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작품을 낳기도 했다.
고운 최치원을 시작으로 고려 때는 이인로, 조선시대에는 서경덕,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남명, 서산대사 등이 지리산에 올랐다가 느낀 바를 작품으로 남겼다. 고운은 지리산 곳곳에 글과 글씨를 남기고 가야산에서 영원히 입산하며 '스님이여 산 좋다 말씀마오/이렇게 좋은 산을 낸들 어이 떠나겠소/뒷날 내 자취 찾아 보시구려/한번 들면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니'를 읊고는 약속대로 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이인로는 고려 무신정권 아래서 참담한 생활을 하다 이상세계를 찾아 지리산에 들어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구나/천암(千巖)이 다투어 솟아 있고/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데/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복숭화꽃 살구꽃에 어리어/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 하구나'라고 노래했다.
화담은 반야봉에 올랐다가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 라는 시를 읊고는 즐거워 했다고 『화담집』에 기록하고 있다.
점필재와 그의 제자 김일손은 각각 17년의 간격으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점필재는『유두류록(流頭流錄)』을,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천왕봉 일출을 보면서 '햇살에 비친 계곡과 하늘이 온통 구리쇠를 갈아 뿌린 것 같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차츰 눈에 들어오는데 대지의 모든 산이 개미집이요/지렁이가 흙을 물어 쌓은 듯하다'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천왕일출 감상을 적고 있다.
‘흰 구름이 산골짜기에 자욱하니 푸른 바다 물결은 포구를 이루었고, 흰 파도가 눈을 몰아내니 산뜻한 섬이 되어 점점이 깔린 듯하다. 돌담에 몸을 기대고 위아래를 바라보니 정신도 마음도 한가지로 막막하여 몸이 태초의 공간에 안긴 채 하늘과 땅과 더불어 흘러가는 듯 했다’.
-지리 십경 (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게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 바다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옛 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 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자락에서 내려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칼바위]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곤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칼바위 안내판)
[망바위] 해발 1068m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법계사] 해발 1450m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0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 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 번째는 1948년 여수반란 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버린 것이라 한다.
[개선문(개천문)] 凱旋門
천왕봉 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달리 개천문(開天門)이라고도 부르는데, 개선문보다는 이 이름이 타당하고 뜻 깊은 듯 보여진다.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 해발 1800m
남강댐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 물줄기 여기에서 발원되다.
→남덕유산의 산상 ‘참샘’에도 남강의 발원지라고 되어 있는데, 확실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천왕봉] 해발 1915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천왕봉 일출은 지리 제 1경이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수있다는 천왕봉 일출은 그만큼 보기 어렵다는 뜻이 아닐까?
- 천왕봉의 성모상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 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아진 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수십 여성상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
◆[제석봉]
천왕봉 서쪽에 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부근은 느슨하고 봉긋한 형태다. 과거에는 고사목이 즐비하여 별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수도 많이 줄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의미지만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으므로 어울리는 이름 같지는 않다.
제석봉 고사목(枯死木) 유래..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라고 무상의 세월을 말하는 고사목 군락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50여년 전에는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의 청년같은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려 불을질러 그 불이 제석봉을 태워 지금처럼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탐욕에 눈먼 인간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자연파괴 행위가 이처럼 현재까지 부끄러운 자취를 남기고 있다.
[장터목]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개 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서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연하봉]
장터목의 남서쪽 봉우리로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건너다볼 수 있는 위치다. 정상은 암장으로 형성되어있다. ‘지리8경’ 중 ‘연하봉 선경’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연기(煙연기연)가 노니는(霞놀하) 선경’이니 매우 아름답다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연기는 당연히 구름을 지칭하며 선경이라 함은 좁게는 바로 건너다보이는 천왕봉이고, 넓게는 천왕봉은 물론 중산리계곡과 거림계곡, 백무동계곡 그리고 겹겹이 둘러져 꿈틀대는 능선 등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촛대봉]
옛날에 연진이라는 여인이 남편 호야와 대성계곡에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녀가 없어 고민하던 중 흑곰에게 세석고원에 있는 신비의 샘물을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남편과 상의 없이 산신령이 금기시킨 영신봉 음양수를 마셨다. 평소 흑곰과 앙숙이던 호랑이가 산신령에게 일러바쳐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 남편과 생이별한 채 철쭉밭을 가꿔야하는 벌을 받았다고 한다. 연진 여인이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고 천왕봉 산신령에게 용서를 빌다가 돌로 굳어버렸고 촛대봉 바위는 연진 여인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촛대봉 유래 글 축약)
평생 손끝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철쭉꽃을 가꾼 여인의 슬픔과 피가 이 곳의 철쭉꽃을 처연하도록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사람들은 믿었다 한다.
[세석고원] 1074m
<지명>
오래전에는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 표현으로 바꾸어 세석평전이라고도 했는데 ‘평전(平田)’이 일본식 표기라는 의견이 있어 일반적으로 세석고원으로 불리고 있다.
<역사>
사실 세석의 철쭉은 연한 빛으로 창백하기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설가와 문장가들이 자극적인 붉은빛으로 묘사한 이유는 과거 빨치산 투쟁 때 이곳에 김일성대학이 있었고, 또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라서 이들의 흘린 피와 절규가 한(恨)의 꽃으로, 즉 과거 이데올로기의 비극의 채색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현상의 남부군 주둔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남부군의 군중대회와 연극공연 등이 열렸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토벌대에 포위되어 몰살을 당했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리>
경남 산청. 거림계곡. 함양의 백무동. 하동의 청학동 등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지리산의 중심지. 세석고원(細石高原, 1400m~1703m)은 약 30만평에 달하는 드넓은 면적과 남향으로 15도 경사를 이루며 완만하게 펼쳐진 지형이다. 이로 인해 남녘의 개마고원으로 불릴 정도로 지리산에서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지형을 보이는 곳이다.
이곳에 자생하는 구상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지리산, 한라산, 덕유산 등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세석고원에는 200여종의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또 세석철쭉은 ‘지리 제 6경이다’ 또 달리 ‘세석척촉’으로 유명하다.
◆[영신봉] 1651.9m
‘산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을 ‘낙남정간’이라 하는데, 정맥의 시작되는 곳이 영신봉이다. 300~800m의 산들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 되고, 영신봉에서 옥산에 이르는 구간의 남쪽은 서쪽의 섬진강으로 물을 보낸다. 그러나 낙남정맥이 동쪽으로 방향을 정한 뒤로는 남쪽의 바닷가로 물이 흐른다.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익산을 지나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에서 끝나는 낙남정맥은 내륙과 남부 해안지방과의 경계로 작용한다.
[청학골]
해발 800m의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삼신봉 남쪽 자락에 그림처럼 펼쳐진 지리산 마을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거하기도 했던 곳이다. 전설로는 청학이 많이 노닐던 곳이라는 유래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수많은 묵객들이 삼신봉을 중심으로 한 살기 좋은 곳, 즉 이상향을 찾아 나섰던 곳이란 느낌이 들게 하는 산세와 물줄기를 가지고 있다. 청학이란 '푸른 학'이라는 뜻으로 전설에 의하면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면서 도술부리는 새로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儒佛仙三道合一更正儒道會」라는 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유교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 불교, 선도와 동학, 서학을 하나로 합하여 큰 도를 크게 밝혀 유도를 다시 일심으로 교화하는 도' 라는 뜻이다. 이들 대부분은 논밭에서 식량을 자급하고 양봉과 축산, 약초, 산나물 등을 캐다 팔고 하동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해 쓰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언젠가는 그 이상의 세상이 여기에 올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청학 마을의 서당에서는 청소년에게 한학과 예절 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곳엔 또 다른 설화가 있다. 옛날에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나무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쫓아가다 어떤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 곳은 캄캄한 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 나무꾼이 한사람을 붙들고 이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 사람이 옛날에 세상의 난을 피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무꾼은 푸짐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나무꾼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한다.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靈神峰:1,651m)에서 낙동강 남쪽을 가로지르며 김해 분성산(奮城山:360m)까지 약 299km에 이르는 산줄기.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옥녀산(玉女山)·천금산(千金山)·무량산(無量山)·불모산(佛母山) 등으로 이어져 분성산에 이른다. "白頭大幹은 白頭山에서 시작해서 白頭山에서 끝난다"는 말이 있듯이 洛南正脈(正幹)의 끝은 분성산이 아닌 김해대동에 위치한 백두산이 아닌가 싶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대체로 경남 남서의 해안지방, 즉 하동·사천·삼천포·고성·마산·창원·김해가 위치한다.
◆[칠선봉] 해발 1576m
북쪽으로 백무동계곡과 남쪽으로 대성골이 관찰되는 위치다. 봉우리 자체가 암장으로 형성되어 있다. 천왕봉과 제석봉이 가까운 거리로 보이고 날씨가 좋을 때는 연하봉과의 사이에 있는 장터목산장까지 보인다. 일곱개의 바위가 오밀조밀 모여서 정상을 이룬다고 해서 칠선봉이다.
◆[덕평봉]
<지명>
정상부가 ‘각지지 않고 평평한 것이 덕스러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덕평 마을이 자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평마을의 원래 이름은 영신마을이었다. 덕평마을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의 주장은 선비샘 아래편의 상덕평 분지라고 하고, 또다른 주장은 영신사에서 가까운 음양수 샘 부근이라고 한다.
<지리>
화개동천의 의신 마을에서 덕평봉(德坪峰 1,651m) 선비샘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이 있다. 선비샘 직등 루트인 이 산길을 편의상 덕평봉 코스라고 부른다.
이 등산로는 가파른 부분과 평탄한 길이 번갈아 이어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져 있어 딱딱한 바위를 찾아보기 어렵다. 산행하는데 이상적이며 시종 서정적인 오솔길이 나타난다. 키 큰 나무들의 터널을 통과하는가 하면, 사람의 허리 정도의 산죽(山竹)밭을 지나기도 하고, 억새풀밭을 거쳐 가기도 한다.
[선비샘]
의신마을에서 7Km 의 직등 루트를 올라 만나는 선비샘은 지리산 종주산행 코스에서 귀중한 식수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 선비샘의유래 -
덕평봉 남쪽 해발 1,500m 에 있는 샘터를 선비샘이라 한다. 수량은 적으나 마르는 적이 없고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도 좋다.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는 데는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이 있다. 「옛날 덕평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화전민의 자식으로 가난에 쪼들리며 평생을 살았다.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데다 몹시 추하게 생겨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았는데 노인은 한번만이라도 남에게서사람다운 대접, 선비대접을 받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생전 소원을 이루지 못한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상덕평 샘터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해서 효성이 지극한 두 아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위에 매장했다. 그로부터 매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샘에서 물을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서 인사를 하게 되니 샌전에 그렇게 받고 싶었던 선비 대접을 무덤속에서나마 받게 되었다. 후일 동네사람들은 불우했던 이씨노인을 위로 하기 위해 이 샘을 선비샘으로 부르게 되었다.」
<전설>
선비샘에는 한 노인의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상덕평 마을에서 평생동안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사후에라도 사람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노인의 아들들은 선비샘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을 하는 격이 되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선비샘은 몇 해 전까지 무릎을 꿇고 물을 떠야 했다. 현재는 이 샘물을 파이프로 시멘트 물탱크에 연결하여 선채로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노인의 무덤도 사라지고 없지만, 전설이 무색하게끔 상황이 변모한 것이다.
<자연조건 및 인물>
선비샘에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와 헬기장 조금 못미친 부분에 편편하고 넓은 터가 있다. 이 평지에는 놀랍게도 물가에서 자생하는 수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의신마을 주민들은 이곳이 지난날에는 큰 못으로 의적 두목 임걸년이 배를 띠우고 놀았던 곳이라고 말한다. 이 못 주변에는 산죽이 밀생하고 있는데. 산죽이 더 이상 뻗어들지 못하고 있는 사실과 수초가 자라는 점, 현재에도 물이 솟아나고 있는 것을 들어 '임걸년 못' 이라고 불렸던 것이 거짓이 아니란 주장이다.
의적 임걸년의 활동 본거지는 현재 임걸령으로 불리고 있는 반야봉 아래편이다. 엄걸년이 덕평봉 까지 와서 배를 타고 놀았는지, 또는 관헌에 쫓겨 화개골로 숨어들었다는 도둑 장영기를 잘못 알고 있는지, 과연 실제로 배를 띄울 수 있었을 만큼 큰 못이었는지도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의신마을 주민은 못터 주변의 산죽밭을 뒤져보면 배를 매달았던 두 개의 돌기동을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곳과 가까운 선비샘에도 임걸년의 일화 한 토막이 전해오고 있다.
임걸년은 애마(愛馬)의 달리기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선비샘에서 세석고원쪽으로 힘껏 활을 쏘았다고 한다. 그는 활을 쏜 것과 동시에 화살이 나는 방향으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가 목표지점까지 갔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임걸년은 애마의 달리는 솜씨가 형편없다고 판단하여 말의 목을 잘라버렸다. 말의 목이 떨어진 뒤 자신이 쏜 화살이 그제야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그는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전설이 경북 희양산 등 여러 곳에서도 가각 다른 주인공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믿을 것은 못된다. 아무리 빠른 말이기로서니 들판도 아닌 바위와 나무가 어지럽게 뒤엉킨 산을 화살이 날아가는 것보다야 빨리 달릴 수는 없을 것이다.
◆[벽소령]
지리산 허리춤에 위치한 벽소령은 화개재나 장터목과 함께 지리산의 남북을 넘나드는 고개중의 한 곳이다. 벽소령의 달밤은 여러 문장가들에 의해 시와 소설이 되었고, 동란중 빨치산도 벽소령을 넘을 때 달빛 때문에 고향을 그리며 울었다고 한다. 밝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지리산 달밤의 운치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푸른밤’ 이란 뜻의 벽소령은 언제부터 ‘벽소령’이라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해오는 고서 및 고지도에 표기되어진 것을 보면 대개 1750년경이 아닌가 추정한다. ‘벽소(碧푸를벽宵밤소)’라는 단어는 1751년에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온 듯하다.
‘지리산의 북쪽은 함양 땅이다. 영원동, 군자사, 유점촌이 있는데 남사고는 이곳이 모두 복지라고 했다. 또 벽소운동과 추성동은 모두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이중환이 말한 ‘벽소운동’이 지금의 백무동이 아닌가 추정이 가지만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다. 다만 마천 쪽의 벽소령 자락에 있었던 마을임은 분명하다.
태초에 길이 생겼을 때부터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었던 사람들은 고개의 이쪽저쪽에 사는 민초들은 물론, 등짐 진 보부상들, 혹은 지리산에서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과 수 많은 절집의 스님들이었겠지만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찾은 유산객들도 이 고개를 넘나든 흔적이 많아 보인다.
조선시대의 유산기에서 벽소령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진주선비 하익범이다. 1807년 중산리 - 천왕봉 - 벽소령 - 칠불암코스로 산행을 한 그는 ‘망암(칠선봉으로 추정됨)을 따라 벽소령 냉천(선비샘으로 추정됨) 역참까지 70리였는데 여기서부터 비로소 길이 아래로 꺾였다’고 ‘유두류록’에 기록을 했다.
당시 양쪽 산자락의 고개 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의신쪽의 삼정리와 마천쪽의 양정마을에는 주막까지 있어 지나는 길손들이 요기와 함께 숙박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시절(1972년) 작전도로가 생기면서 그 옛날 오솔길들은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아직도 흔적은 있어 최근에는 등산객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오솔길이 빗점골 상부의 천내골, 오리정골, 광대골 상부의 소금쟁이길 등이다.
벽소령의 원래 이름은 ‘초료조(鷦鷯鳥)재’였다. 추강 남효온이 쓴 지리산기행문인 ‘지리산일과’(1487년)에 ‘초료조재’가 등장한다. 초료조는 우리가 흔히 촉새 또는 때까치라고 부르는 뱁새의 학명이며, 한국의 텃새이다.
한편 고개 밑의 의신마을 사람들은 벽소령을 ‘뱁실령’이라 부르고, 벽소령 샘을 ‘뱁실샘’이라 부른다. 500년 정의 기록물에 보이는 벽소령의 옛이름 ‘초료조재’, 즉 ‘뱁새재’가, 어원의 근거지인 옛날 의신사가 있었던 의신쪽 사람들이 부르는 ‘뱁실령’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진다.
벽소명월은 지리 제 5경에 들어간다.
◆[형제봉] 1115m
지리산 자락 가장 남쪽에 있는 최고봉.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깊은 형제와 모습이 비슷하여 형제봉이라 한다. 정상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어 매년 5월에는 철쭉제를 개최한다. 형제봉 등산로 주변에는 통천문, 신선대, 봉수대, 고소성 군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고소성 군립공원에서 내려다보면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 가 한눈에 보인다. 또한 악양팔경(岳陽八景)이라는 악양의 주요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형제봉의 정확한 지명은 부자바위 즉 부자암(父子巖)이다. 형제봉 아래 사는 마천의 삼정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부자암을 형제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역민들이 형제봉을 부자암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설화 때문이다.
<부자암 설화>
조선시대에 지리산 마천의 삼정마을(양정, 음정, 하정)을 끼고 흐르는 광대골에는 전래설화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목욕을 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몰래 엿본 나무꾼이 한 선녀의 옷을 훔침으로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는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하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여기까지 스토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거의 비슷하나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후편에 가서는 조금 각색이 되어 부자암의 전설을 잉태시켰다.
선녀는 지아비와 두 아들을 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삼부자는 날마다 지리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아내와 어미를 기다리다 화석이 되어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화석이 되어버린 바위덩어리들을 부자바위라고 불렀다. 선녀이름은 ‘아미’이고, 나무꾼‘인걸’은 옛날 하정부락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인물이라고 전설은 전하고 있다. 산 아래 하정마을 쪽에서 보이는 부자암의 모습은 꼭 삼부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형상이라고 하나 속인의 눈에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정마을 사람들은 전설의 주체가 되는 부자암을 기리기 위해 1976년에 ‘석문암계’라는 친목계를 조직해 선녀와 나무꾼이 살았다는 부락의 계곡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매년 초복이면 전설속의 나무꾼인 인걸 삼부자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부자암에서 발원한 광대골 물길의 상부 골짝을 지역민들은 ‘부자바위골’이라고 한다.
◆[명선봉] 해발 1586m
연하천 발원지의 남서쪽 봉우리다. 정상에는 이정표와 쉼터가 있다. 대성리 의신마을과 삼정마을(마천리 삼정리가 아님)이 계곡 안에 묻히듯 가라앉은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명선봉에서 연하천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형제봉과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이 묘하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토끼봉]
반야봉에서 방위가 묘향이라 하여 묘봉이라 불리다 토끼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들이 덕평봉 전의 봉우리에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꽃대봉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뱀사골]
뱀이 많아서 뱀자가 들어간 지명이 붙었을 수 도 있으나, 뱀의 골짜기란 뜻이라면 ‘뱀골’이 되어야 하는데, 뱀의 뜻을 지닌 ‘사’자가 또 들어간 ‘뱀사골’은 의문이 간다. 지금은 사전에도 없고, 쓰이지도 않는 말이 되었지만 심하다는 뜻의 ‘배다(베다)’가 있었다. 따라서, ‘비탈이 배다(베다)’라고 하면 비탈이 매우 심하다는 뜻이 된다. ‘밴+샅(사이)+골 → 뱀샅골 → 뱀사골’로 비탈이 심한 골짜기란 뜻에서 나왔다고 가정 해볼 수 있다. 2008년까지 뱀사골대피소가 있었으나 국,공,단 관리방침에 따라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화개재]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의 허리목이자 뱀사골과 화개골을 연결하는 노루목이다 북쪽 발아래로 뱀사골산장의 지붕이 보인다. 헬기장과 야영장이 있다.
지리산 능선에 있었던 장터중 하나로,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올라오는 소금과 해산물, 전북에서 뱀사골로 올라오는 삼베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하던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지역간 도로가 개설되어 사람들이 편하게 이동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어떻게 짐을 지고 이곳을 오르내렸을까요? (화개재 유래문 전문)
[화개재~삼도봉,548계단]
화개재와 삼도봉 구간에 1999년 설치한 나무 계단으로, 폭 1.5m 길이 240m 누군가 10계단마다 계단 오른쪽 하단에 표시를 해 두어 548개로 적혀 있으니, 548개가 정확하게 맞는 것 같다.
삼도봉 오르는 계단, 몇 개일까? 누군가 10단위로 계단에 적어놓았는데, 520계단에서 다음 10계단위에 570으로 적어놓았으나 2010년 6월에 백두대간종주하며 힘들지만 정확하게 헤아렸다. 548계단 확실하다.
◆[삼도봉] 해발 1449m
남한쪽 대간의 세번째 삼도봉이다. 경상남도, 전라남,북도의 도계가 갈라진다. 반야봉의 남동쪽이자 화개재의 서쪽에 있다. 정상부는 심하게 주름진 암릉이다.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불무장등능선이 전마로가 경남을 가르는 경계이고, 그 끝에 화개장터가 매달려 있다. 불무장등능선은 쌍계사와 연곡사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형상인데 이곳을 등반하면 지리산은 졸업했다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반야봉을 목표로 오르는 산꾼들과 여행자들은 반선~뱀사골에서 올라와 화개재~삼도봉~노루목~반야봉의 원점회귀 코스를 좋아한다.
[반야봉] 해발 1732m
주능선의 삼도봉에서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독립봉으로는 천왕봉에 이은 두번째 고봉이다. 전라남,북도에서는 제일 높은 봉우리(1732m)로 호남제일봉 이라고도 한다. 생김새는 달마대사의 머리를 닮았다. 심원과 쟁기소, 반선으로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모두 북봉에서 갈라진다. 반야봉에는 남신의 상징인 반야와 천신의 딸이자 여신인 마야고 사이에 얽힌 러브 스토리가 전설로 내려온다. 반야낙조는 지리 제 4경에 들어간다.
<전설>
마야고(마고)는 어느 날 사모하는 반야의 옷 한 벌을 지어놓고 반야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원에 핀 쇠별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물결칠 때마다 마야고는 행여 반야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야고는 마침내 신명나게 머리채를 나부끼며 그 꽃잎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았다. 쇠별꽃의 움직임을 착각한 마야고는 수치와 분노를 못 이겨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피지 못하게 하고 반야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어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이 전설의 흔적은 지금도 지리산에 남아 있다. 그녀가 메워버린 못을 누군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샘’이라 부르고, 찢겨져 흩어진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 풍란은 ‘환란’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노루목]
1.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
2.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
노루목이란 명칭은 이곳의 암두(巖頭) 모양새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든 모습이란 얘기와, 노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라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또한 문순태의 장편소설 ‘철쭉제’에는 ‘산에서의 세 갈림길’을 흔히 노루목이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길목인 노루목에서는 흔히 세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는, 땅의 모양이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으로 ‘널’자에 지점이라는 뜻의 ‘목’자가 합쳐져 널목→놀목→날목→너르목→노루목 등으로 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임걸령]
전설에는 초적 도적 임걸년은 팔도행상의 물건을 일부만 털었고, 또 그것을 모아 빈민을 구제한 의적이라고 하는데 실제 임란 당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선조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의병의 기록과 사회상 기록)에는 1594년 6월 ‘이때에 영남사람 임걸년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둔쳐서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임걸년이 와전되어 임걸령이라 한다. (출처 못 찾음.)
임걸령에서 노고단까지는 대체로 순탄한 길이라,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향해 화살을 쏘고 말을 타고 달렸더니 말이 먼저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주변에 키 큰 나무가 호걸처럼 많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피아골]
지리산 피아골 관문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타고 북서쪽의 구례로 달리다가 화개장터 앞을 지나 2Km쯤 더 간 외곡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이 마을에서 섬진강 큰 물줄기와 헤어져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연곡천의 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피아골의 긴 골짜기가 주위의 풍경을 펼쳐 보이며 산길을 안내한다.
목아재와 촛대봉이 반원형으로 터 준 골짜기를 오르면, 양쪽 산기슭에 기촌, 가락골, 중터, 조동 등의 마을들이 차례로 타나면서 외진 산길의 적적함을 덜어 준다. 촛대봉 능선이 경남과 전남을 갈라놓았다. 옛부터 두 도(道)의 사람들이 오가던 길 줄기들이 등성이를 나란히 얽어 느랏목, 뒷골재, 새끼미재 등의 고개들을 만들어 놓았다. 목아재를 감돌아 산길 왼쪽으로 비스듬히 발길을 꺾으면 조선시대에 원집이 있었다던 원터에 닿는다. 더 오르면 피아골이다.
마을의 한자명은 직전(稷田), 여기에서 직(稷)이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작물로 ‘피’라고도 불린다. 즉 피밭이다. 피아골 골짜기를 직전계곡이라고도 한다. 6.25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피를 많이 흘려 ‘피의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피아골을 피와 관련지어 지명의 원뜻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6.25 전에도 ‘피아골’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피아골 직지단풍은 지리 제 2경에 들어간다.
◆[돼지평전]
예로부터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름이 생겼다.(일부에서는 원추리 뿌리를 캐먹는 멧돼지들의 모습이 많이 목격돼 돼지평전이 됐다는 설도 있음)
◆[노고단] 1507m
<지명>
노고단이란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다. 서술성모를 마고할미로 존칭하며 부르게 된데서 노고단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서술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였다.
산정부에 가까운 1,100∼1,200m 높이에는 원추리꽃으로 덮인 광활한 고원이 펼쳐져서 부근이 좋은 피서지를 이루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서양사람들의 별장지가 되었다. 노고단의 경관은 울창한 임상(林相)과 웅대한 산용(山容)의 경치가 훌륭하고, 정상부에서의 조망이 뛰어나다. 서쪽 계곡에는 화엄사(華嚴寺)가 있는데, 경내에 각황전(覺皇殿)을 비롯해 국보·보물로 지정된 전각(殿閣)·석등(石燈)·석탑 등이 많다. 노고단운해는 지리 제 3경에 들어간다.
<마고할미 전설(반야봉)>
지리산 산신 중 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는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코재]
종석대 동쪽이자 화엄사계곡에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깔딱고개의 끝이다. 언젠가부터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자들이 섬진강을 멀리서 구경하고 지나간다. 성삼재로 차량이 올라가기 전에는 화엄사를 산행기점으로 삼아 이곳 코재를 경유했다. 화엄사에서 올라가자면 줄잡아 3시간 30분 소요된다. 화엄사에서 오르자면 코재를 앞두고 경사가 하도 급하여 ‘코가 당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라 부른다 한다.
◆[종석대]
성삼재의 남쪽이자 코재의 서쪽에 올라앉은 봉우리다. 동은 지리산 주능선, 서는 시암재와 양미봉으로 연결되는 서릉, 남은 원사봉으로 이어지는 차일봉능선, 북은 만복대로 올라가는 서북릉이 종석대를 기점으로 갈라져 나간다. 코재에서 출입문을 만들어놓고 통제하는데 관리인은 없다. 정상부가 암릉인데 ‘엎어놓은 종처럼 오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올라간다. 정상에는 단정한 휴게소와 식당이 있다. 이곳에 있는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서북능선인 만복대까지 관리한다. 일반 등산객들은 종석대를 거치지 않고 코재로 직접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을 다듬어 바닥에 끼워맞춘 돌포장도로가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까지 올라간다. ‘3개의 재(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팔량치
조선시대의 팔량치는 팔량관(八良關)이라 하여 꼬박 나라에서 지켰다. 나랏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던 탓이다. 흔적은 역력하여 흥부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한 성산 마을에는 지금도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치에 여원재까지의 산성만도 그 수를 한참 헤아려야 한다. 달구경이 그만인 인월에서 보면 팔량치는 생김이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져 있다고 한다.
-달궁 이야기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달궁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달궁이라는 이름은 계곡 들머리의 마한 왕궁터에서 비롯됐다는 것만 어렴풋이 전해진다. 달궁계곡이 마한 왕조의 피신처였음을 밝힌 이는 김경렬씨다. 김씨는 저서 <다큐멘타리 지리산2>에서 지금의 달궁계곡에서 지리산 개산의 비밀을 풀었다.
마한왕조와 관련한 지리산 자락의 기록은 지리산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서산대사가 황령 아래 있던 절 황령암에 대해 적은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일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해 가운데 한 산이 있으니 지리산이다. 이 산 북쪽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부른다.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과 정령이다. 옛날 한나라 소제 3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서 도성을 쌓을 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공사케했다. 도성이 완성된 후 고갯마루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 가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했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 험준한 산세 중 적이 넘어오기 쉬운 길목마다 수비군을 배치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 팔량치라 했다. 서쪽은 정장군을 배치하고 정령(현재 정령치)이라 칭했다. 동쪽은 황장군을 배치시켜 황령으로 불렀다. 남쪽은 특히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 방어토록 하고 성삼(姓三)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오늘날 지리산 자락을 동강내고 도로가 연결된 해발 1090m의 성삼재다.
기원전 78년의 일이었다. 그때 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달궁계곡이고, 이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남아 억새를 키우고 있다.
일제시대인 1928년 7월 대홍수가 휩쓸면서 달궁은 전설에서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심원계곡에서부터 불어난 계곡물이 덮치면서 달궁터를 감추고 있던 흙이 씻겨 나갔다. 그때 드러난 것은 지금의 주춧돌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름 1.5m에 이르는 질그릇 시루와 청동제 수저 수십벌, 구리거울, 활촉 등도 출토됐다. 그러나 그 유물들은 일본 순사들이 어디론가 가져가버린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마한 왕조의 유적은 새걸산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곳곳에서도 찾아진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도 멀쩡하게 남아 있다. 마한의 정 장군이 달궁계곡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어진 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설명문에는 조각양식이 고려조의 수법이라고 적혀 있지만 인근에서는 마한 장군상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12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고 보물 1123호라고 적은 설명문에는 9분의 부처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꼼꼼히 찾아봐도 3분의 부처 이외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풍화된 탓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나 탁본을 떠갈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던 탓이 더 커보였다. 포수들도 마한 장군상 앞에 이르러서는 ‘마한 임금님의 성지’라 하여 동물을 놓치면 놓쳤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말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1400여m에 이르는 고봉의 능선이면서도 마한 장군상 앞은 유난히 평탄하다. 지금은 빽빽한 잣나무 숲인 이곳에서 마한의 군대가 주둔했던 터일지도 모른다. 1960년 이곳을 사탕수수밭으로 개간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그때 여러 가지 유물들이 출토됐지만 그 유물들도 달궁의 유물들과 똑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고단 일대는 화랑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기도 했고 고려조에는 몽고군과의 항전이, 임진왜란에는 왜적의 침입을 피하기도 했던 곳이다. 무수한 역사의 두께가 덮였을 텐데도 지워지지 않은 2천여년 전 마한 왕조의 이야기는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삼한시대 달궁계곡 일원은 삼한시대 마한의 왕조가 망명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마한왕조가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34년(서기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을 토벌한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3세기 후반 마한세력이 중국과 교류했다고 나오고, 4세기에는 마한의 일부세력이 서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로 보아 부족국가 마한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궁마을에 쫓겨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부족국가가 바로 이들 무리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명수의 '지리산(2001.돌베개)'중에서>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마한이 백제에 의해 멸망했다고 기록한 연대가 온조왕 27년, 서기로는 기원 후 9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시조인 온조왕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한참 뒤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온조왕의 업적인 양 끌어올려 기록해 놓았다는 설이 거론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백제가 마한을 굴복시키고 그 지역을 백제 영역으로 병탄시킨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였을까?
목포대 강봉룡 교수는 ‘백제의 마한 병탄에 대한 신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백제가 마한을 병탄시킨 시점이 백제의 제9대 임금이었던 3세기 말, 책계왕 때였다고 주장한다.
백제왕이 처음 북쪽에서 왔을 때, 마땅히 거처할 땅이 없다하여 마한의 국왕은 그의 땅 1백리를 떼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이다. 마한은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다. 지리산 마한 왕조는 후에 지리산이 김해 가락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것으로 봐서 가야세력에 의해 정복된 것으로 추측된다. <KBS1 라디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中 요약> |
반야봉·노고단·만복대·고리봉·덕두봉 등의 고산준령에 둘러싸인 달궁마을에서 심원마을까지 6㎞에 걸쳐 흐른다. 지리산국립공원에 있는 계곡 가운데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계곡의 하나다.
약 20m 떨어진 곳으로 지리산 종단도로가 지나지만, 계곡으로 들어서면 쟁기소·쟁반소·와폭·구암소·청룡소·안심소 등 폭포와 소(沼)가 비경을 이룬다. 계곡로를 따라 쟁기소를 지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쇠다리를 건너면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으로 오를 수 있다.
반야봉 아래 중봉 조금 못미친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심원계곡이 나오고, 심원계곡을 따라 하산하면 심원마을에서 다시 달궁계곡의 끝부분과 만날 수 있다. (네이버 테마백과사전) |
◆[작은고리봉] 1248m
작은고리봉은 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그 맥을 달리하는 바위산이다. 남원시를 벗어나 곡성쪽으로 서진하다 보면 금지들이라 불리는 평원에서 눈앞을 가로막고 솟은 바위산이 바로 작은고리봉이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작은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대추, 밤, 곶감)과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1962년 가뭄이 극심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작은고리봉 정상 부근에 있는 묘를 파헤쳐야만 가뭄이 해소된다는 풍문이 떠돌아 대강면 사석리로 갓 시집온 어느 아낙이 자기 증조모님의 묘인 줄 모르고 파헤쳐 버렸다 한다. 그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금잔디를 심었다 하며, 1945년 이후 아낙네들이 기우제에 참가하여 남자들보다 아낙네들이 주축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1973년 6월과 7월에 걸친 극심한 가뭄 때 대강면 사석리 아낙네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도중 큰 비를 만났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전설로 남아 있다.
◆[묘봉치墓峰]
만복대와 고리봉 사이의 허리를 낮춘 부분인데,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앉아 있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서쪽에 산동면 위안리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진다. 묘소가 있는 봉우리다.
◆[만복대] 萬福臺 1438.4m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두산백과사전)
- 만복대의 무너진 돌탑 관련 기사(2008.7.24 스포츠 칸)
24일 등산객들과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남부사무소에 따르면 반야봉(해발 1732)과 만복대(해발 1430)에 있던 돌탑 2개가 최근 무너져 내렸다. 이 돌탑은 10여년 전부터 지리산을 오른 등산객들이 소원을 빌며 돌을 하나 둘 쌓기 시작해 전문 산악인 등 여러 사람에 의해 원뿔 모양으로 다듬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야봉 돌탑은 높이 1.6에 직경 1.5정도이고, 만복대 돌탑은 높이 3에 직경 2.5정도에 달한다.
이와 관련 산악 마니아인 이승우씨(41, 서울 서초동)는 "누군가 산정상의 돌탑을 의도적으로 훼손했다면 이른 아침 산에 오른 수많은 등산인들이 안전한 산행과 가족의 행복, 국가의 안녕, 새로운 각오 등을 다지며 하나 하나 쌓아올린 소망과 정성을 허물어 버린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국립공원측은 돌탑이 무너진 이유를 밝혀달라는 민원이 제기됨에 따라 반야봉쪽의 원인 파악에 나섰으나 이유를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지리산 남부사무소 관계자는 "반야봉 돌탑은 언제 없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현장에 못 가봤다"면서 "만복대의 경우 지난 3월 돌탑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것을 확인, 미관 및 안전을 고려해 공원측에서 인력을 투입해 철거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반야봉 산꼭대기의 오래된 돌탑이 무너진 것을 두고 "최근 내린 폭우로 망가진 것 같다", "돌탑을 미신으로 생각하는 관내 유력인사가 개입돼 있다",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려는 조짐이 아니냐"는 등 루머까지 나돌고 있다.
이후 1~2년 사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안 좋은 일들이 생겼으니 참 아이러니컬 하다. 숭례문화재, 전직대통령 두분의서거, 김수환추기경님의 선종, 천안함침몰 등등... 2010년 6월에 오른 만복대에는 돌탑이 형성되고 있으나, 반야봉은 여전히 흔적이 없었다.
◆[정령치] 1172m
정령치는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달궁 부락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줄기의 고개로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전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 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큰고리봉] 해발 1305m
남원시 산내면과 운봉읍 경계에 있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출발점인 성삼재에서 만복대 구간에 있는 고리봉(작은고리봉)과 구분하여 큰고리봉이라 불리운다. 정령치 휴게소를 떠나 큰고리봉까지 급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큰고리봉에서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 능선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큰고리봉에서 대간은 고기리 마을 방향으로 급격히 뚝 떨어진다.
◆[고기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고촌리(高村里)와 내기리(內基里)가 병합되어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高基里)라 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다. 고기리에는 내기, 고촌 등이 있다. (남원시 주천면 홈페이지)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며 앞으로는 원전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고촌, 안터, 내건너 등이 있다. 고촌은 고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지대가 높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터는 고촌 서쪽에 있으며 골짜기 안에 깊숙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1914년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안내(內)자와 터기(基)자로 고쳐 내기(內基)로 바뀌었다. 내건너는 고촌 남쪽에 있으며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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