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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키

터키 3. 에페소(Eres) 탐방

 

2017. 04. 03(2) : 에페소(Eres) 탐방

                                    소요시간 : 1시간 40

 

<에페소 탐방 경로와 쎌축>

 

 

 

 

라틴어로는 “Ephesus”, 터키어로는 “Efes”로 불리는 에페소를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이곳은 성경에서나 보았었던 곳이니 이와 관련된 자료를 기록으로 우선 남기어 본다!!

 

에페소(Ephesus)
   로마 제국의 도미시아누스 황제(81-96년 재위)는 말년에 자신을 주님이요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 자처하며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 시록 저자는 에페소 일대 아시아 속주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 신앙을 굳건히 지킬 것을 촉구했다. 성서에서 일곱이란 전부를 상징하는 충만한 숫자이기 때문에 묵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낸 것은 결국 세상 모든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에페소 일대 아시아 지방은 사도 바오로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지만, 1세기 말엽 요한계 문헌이 기록될 당시에는 사도 요한의 영향력이 더 컸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거의 대부분의 성당들이 요한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터키 이즈미르(Izmir, 성경상의 스미르나) 항구도시에서 남쪽으로 74km 정도 떨어져 있는 에페소(현재의 셀주크 마을 부근)

사도 바오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도시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 강으로 흙이 내려와 현재는 배가 드나 들지 못한다.

요한묵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이며(묵시 1,11; 2,1), 사도 바오로가 제3차 전도여행 중인 53년경에 27개월 가까이 머문(사도 19,8. 10; 20,31 참조) 에페소는 페르시아, 그리스, 페르가몬 왕국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129년 로마제국 아시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그만큼 에페소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 있던 그리스 도시들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곳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고린토 교회를 창립한 다음,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를 데리고 코린토 동쪽 외항

켕크레애에서 배를 타고 에페소에 상륙하여 그곳에 그들을 남겨 두고 자신은 카이사리아와 예루살렘을 거쳐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다(사도 18,18-22). 그리고 53년경 제3차 전도여행(53-58년경)중 터키 중부 갈라티아(Galatia) 지방 교회와 그 남쪽 프리지아(Phrygia) 지방교회(데르베, 리스트라, 이코니온,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둘러보고 난후 에페소로 가서 27개월을 머물며 활발히 전도한 도시이다.

사도 바오로는 또한 에페소에서 여러 편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유실되고 코린토 교회에 보낸 두 편의 편지만이 남아 있다.


   에페소에는 옛 시내와 아야솔루크 요새 중간 지점에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신전이 있었다.

아르테미스는 로마 신화에서는 디아나라고 한다. 이 신전은 사도 바오로 당시에 이미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인정받을

정도였기에 온 아시아에서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에페소의 은장이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상 모형을 만들어 순례객들에게 팔아 커다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활발한 선교로 수입이 줄자 은장이들의 대표인 데메드리오가 동료 은장이들과 시민들은 선동해 난동을

피웠고(사도 19,21-40), 바오로는 에페소 로마군 병영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렇듯 사도 바오로의 주된 선교 지역이었지만, 1세기 말경 요한계 문헌들이 집필될 때에 에페소를 비롯한 아시아 교회들은 대부분

요한의 영향 하에 들게 되었다. 일례로 요한 묵시록 저자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2-3)를 들 수 있다.

 

 

 

사도행전

[사도] 191~40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다~에페소에서 소동이 일어나다

 

19장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다

1.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2.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4.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5.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7.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8. 바오로는 석달 동안 회당에 드나들며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토론하고 설득하면서 담대히 설교하였다.

9. 그러나 몇몇 사람이 회중 앞에서 주님의 길을 헐뜯으며 고집스럽게 믿지 않으려 하자, 바오로는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날마다 티란노스 학원에서 토론을 벌였다.

10. 이 일이 두 해 동안 계속되어,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다인 그리스인 할 것 없이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바오로가 기적을 일으키다>

11.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12.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

13. 그러자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 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14.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15.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16.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

17. 이 일이 에페소에 사는 모든 유다인과 그리스인에게 알려지니,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18. 그러자 신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자기들이 해 온 행실을 숨김없이 고백하였다.

19. 또 마술을 부리던 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기 책들을 모아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그 책들을 값으로 따져 보니 은돈 오만 냥 어치나 되었다.

20.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은 더욱 힘차게 자라고 힘을 떨쳤다.

 

<에페소에서 소동이 일어나다>

21. 이런 일들이 끝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고,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협력자들 가운데에서 티모테오와 에라스토스 두 사람을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자기는 얼마 동안 아시아에 더 머물렀다.

23. 그 무렵 주님의 길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24. 데메트리오스라는 은장이가 있었는데, 그는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당 모형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장인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시켜 주고 있었다.

25. 데메트리오스가 그 장인들과 또 같은 일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직업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26.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저 바오로라는 자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에페소만이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 지방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유인하였습니다.

27. 그래서 우리의 사업이 나쁜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무시를 당하고,

      마침내 온 아시아와 온 세상이 숭배하는 이 여신께서 위엄마저 상실하실 위험에 놓였습니다.”

2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에페소인들의 아르메테스는 위대하시다!” 하고 외쳤다.

29. 그래서 온 도시가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은 바오로의 동행인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를 붙들어 일제히 극장으로 몰려갔다.

30. 바오로가 군중 속으로 들어 가려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그를 말렸다.

31. 바오로와 친하게 지내던 몇몇 아시아 지방 장관들도 바오로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극장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32. 한편, 이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저 사람들은 저렇게 외치는 바람에 집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무엇 때문에 모여들었는지 알지도 못하였다.

33. 그 때에 유다인들이 알렉산드로스를 앞으로 밀어내자 군중 가운데에서 몇 사람이 그에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 군중에게 설명하려고 하였다.

34. 그러나 군중은 그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알고, 모두 한목소리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 하고 외쳐 댔다.

35. 마침내 서기관이 군중을 진정시키고 나서 말하였다.

     “에페소 시민 여러분,

     에페소인들의 도시가 위대한 아르테미스와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을 지키는 곳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36.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여러분은 진정하고 절대로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37. 그런데 여러분은 신전 강도도 아니고 우리 여신을 모독하지도 않은 이 사람들을 끌고 왔습니다.

38. 데메트리오스와 그의 동료 장인들은 누구를 걸어 송사할 일이 있으면,

     법정이 열려 있고 지방 총독들도 있으니 당사자들끼리 고소하십시오.

39. 그리고 다른 요구 사항이 있으면 정식 집회에서 해결하십시오.

40. 사실 우리는 오늘의 일 때문에 소요죄로 고소를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요의 사유가 없으니 우리는 이 난동을 해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집회를 해산시켰다.

 

 

 

매표소를 통과하자 제일 먼저 오데온(Odelon) 소극장이 보인다.

오데온 소극장은 2세기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극장과 같은 형태로 소극장이라고 한다.

에페소의 정치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하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하며 3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모든 에페소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대형 원형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소극장은 콘서트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 되었는데 총 1400명을 수용하였다.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귀족전용이었다.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쪽의 좌석들은 보존이 잘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 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에페소 입구에 있는 로마 바리우스 목욕탕터 모습이다.

 

 

 

 

 

 

 

 

 

 

 

터키인들은 고양이를 신성시 한단다!!

자유로운 영혼들인가??

터키를 다녀 온 관광객들의 카메라에 수 없이 담겨지는 고양이와 개들인데 여기에서 녀석들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드디어 내 가까이에 원형극장이 다가 왔다.

 

 

 

 

 

 

 

 

 

 

 

 

 

 

아고라(Agra,시장)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때 세워진 시청건물인 프리타네오인(Prytaneion)이 있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에는 영원히 꺼지면 않되는 성화가 타고 있었으며,

이 불은 크레타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에 의해 꺼지지 않게 관리가 잘되었단다.

 

 

 

 

 

플리타네온 신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부뚜막 여신이며 가정의 여신인 헤스티아의 성화가 중앙에 있었다 한다!!

 

 

서민들이 다녔던 크레티아 거리란다!!

한양 땅의 피맛골이란 건지....??

 

 

메미우스 기념탑!!

로마의 웅변가이며 호민관을 기념하는 탑이다.

 

 

 

 

 

이건....??

김 강민 가이드를 다시 불러와야 될듯...

까 먹었다!! ㅋㅋ

 

 

 

 

행운의 여신 니케 여신상 부조!!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빅토리아)으로서

타탄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질투 또는 경쟁심의 상징인 젤로스와 힘을 상징하는 크라토스, 폭력을 상징하는 비아와 남매로

늘날 유명한 스포츠용품 회사인 나이키의 로고는 승리의 여신인 니케의 날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원래는 니케의 여신상으로 헤라클래스 문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건 가짜이며 진품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니케가 영어로 나이키 즉, 승리를 의미하는 “J”자 문형을 이곳에서 따 갔다고 하여 줌인 해 보았다.

 

 

 

 

 

 

 

 

 

 

 

 

 

 

 

 

 

도미티안 황제 숭배 신전!!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 신전에 대한 파수꾼역활을 부여 받았다.

로마시대에 폭군이었다는 도미티안 황제에게 받혀진 신전으로 7m가 넘는 그의 동상이 있었단다.

에페소 사람들이 도미티안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안을 신으로 모셔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만든 신전이란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하고, 밧모섬으로 유배를 시킨 황제이다.

요한은 이 밧모섬에서 낮에는 노역을 하고, 밤에는 굴속에서 예수의 계시대로 요한 묵시록을 작성했다.

도미티안 황제 사후에 에페소로 돌아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우상숭배를 하던 각종 신상들의 목을 쳐 날려 이런 형국을 하고 있다!! ㅉㅉ

 

 

트라얀 황제의 신전!!

우물이 있었던 자리로(일명 : 황제의 우물, 또는 황제의 분수로 칭한다) 

쿠레데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우물은

102~114년애 트라이안 황제에게 받쳐 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만 남아 있다.

 또한, 이곳에서 여러 황실 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사진이 발목이 맞다면 너무 큰거 아닌지...??

 

 

 

 

 

 

 

 

 

 

 

 

 

 

 

 

 

 

저 멀리 아랫동네에 도서관이 살짝 보인다.

그러나 너는 잠시 후에 자세히 만나 보자꾸나...!!

 

 

 

 

 

너(화장실) 또한 잠시 후에...

 

 

하드리안(Hadrian) 신전

하드리안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란다.

139년경에 건축되어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이 장식되어 있다.

 

건물 현관 입구에는 4개의 기둥이 남아 있고,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지나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네 신, 쎌레나 신, 아폴로 신, 에페소의 창건자 안드로롤로스, 헤랄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

태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일행들은 가이드의 그런 저런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사진찍기에 바빠

주마간산 격으로 그냥 다 지나치고 있다!!

 

 

 

가까이 더 가까이...

부조물들을 확이해 본다!!

 

 

마블 스트리트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논 길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마차가 지나는 길은 훼손을 방지하고자

자갈, 모래 등을 몇 층씩 구조적으로 조성했다고 하던데

 그것들이나 이 대리석길에 비하면 요즘 아스팔트는 너무 싸구려가 아닌가??

 

이 거리를 한 계단 올라 서서 높은 곳에서 잡아 본다.

 

 

 

 

 

 

 

하드리아스 신전을 뒤돌아서서 한번 더...

 

 

 

 

1세기에 세워진 에페소의 수세식 공중화장실 

 

 중앙에 사각형의 풀장이 있고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어있다.

변기 아래 2미터 정도 위치에 수로가 있어 변이 흘러가는데 동시에, 상당한 수의 남자들이 함께 앉아서

서로 마주보며 환담도 나누도록 되어있는 구조인데

날씨가 차가워 지면 노예들이 먼저 않아 온기를 유지시키게 하고 귀족들이 볼일을 보았단다.

 

베스파니아누스 황제는 네로가 탕진한 국가재정을 복구하기 위하여 곳곳에 화장실을 만들어 놓고 사용료를 받았으며,

이용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 하였단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이 문제다!!

더불어 나도 그와 연관되어 먹고 살고 있다... ㅋㅋ

 

 

 

 

 

 

셀주크(Celsus Library)도서관/두란노 서원

135년 줄리어스 아퀼라(C. Aquila)가 아시아주 총독으로 에페소에 부임했다가 죽은

그의 부친 셀수스 폴레마 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아고라시장 앞에 2층 건물로 125년에 세워 졌으며,

12천권의 양피나 파피루스로 된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습기나 좀, 벌레의 피해를 막기 위해 통풍이 잘 되도록 설계를 하였다.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드물게도 2층의 전면 구조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도서관 정면 벽에는 네 명의 여인의 석상이 있는데 이는 각각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하고,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벽으로 되어 있어,

당시에 소장 하였던 수 천권의 두루마리 책을 보호하였으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여러 차례 많이 훼손 되었으나 최근 재건되었다 하며,

사도 바울이 2년 동안 열심히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강론하며 복음을 전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19:9참고)

또한, 대리석 거리 끝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물로 에베소의 상징이기도 하고,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 있다.

에페소가 한찬 번창하던 시절 이 도서관은 셰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이였단다.

가장 컷던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있었으나 화재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나 홀로 쎌카 놀이를 해 보았는데 지진이 나서 기울여진 분위기가 난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도서관 문에서 밖을 바라본 장면이다.

 

 

이런 이런!!

도서관 바로 옆에 아고라(시장)로 향해 열린 3개의 아치로 조성된 문의 사진 전체부분이 사라졌다!

그리고 일부분만 찍은 것 한 장이...

이것은 위로가 되지를 못한다.

어찌돤 영문인지...??

 

 

 

 

 

 

 

 

 

 

 

 

 

 

 

사진이 없어진 3개의 문을 밖에서 찍었는데 이것마저도 짤렸다. !!

 

 

 

 

이제 원형극장으로 향한다.

곧게 뻣어 있는 이 길은 아카디아나라 부른다.

이 길의 끝은 항구였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강에서 흘러내려 온 퇴적물로 인하여 바다가 없어 져 버렸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 한강 하구에 퇴적물이 쌓이면 강화도도 육지가 되는 것인가??

가끔 이런 슬데 없는 생각이 드는 나는 몬지...??

 

이 아카디아나 길 양쪽으로 코린스 양식의 돌기둥 들이 열병식을 하듯 늘어서 있다.  

이 항구로 향하는 도로는 로마제국 당시 배를 이용해 에페소로 오는

황제나 귀족, 총독들을 위한 통로로 이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다.

또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함께 걸었던 에페소의 메인 길이다.

 대리석 밑으로는 배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단다.

 

 

오호라 이건 몬가??

발가락이 긴쪽 방향에 유곽이 있는 곳이고,

발의 크기가 이 그림보다 커야 그곳에 출입을 할 수 있었다 하니

세계 최초의 홍등가 광고판이자 미성년자 감별법이 되겠다.

 

사진 위쪽을 보면 하트모양이 있고 , 오른쪽에는 왕관을 쓴 여자 그림이 있다.

또한, 하트위에는 돈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로 돈을 그려 놓았다(그림자로 인해 잘 보아야 한다.)

 

이렇듯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의 대리석 광고판이 되겠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단한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고대원형 극장-대극장 (Ephesos Theatre)  

아르카디안 거리  끝에 조성된 거대한 원형극장이다.

피온산 산기슭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건축되었으며,

오늘 날의 모습은 트라얀(Tarjan) 황제 시대의 모습으로 로마나 그리스 형식의 극장 모습이다.

3부분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8m 높이의 무대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 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꾸며져 있었다 한다.

 

40m 지름의 중앙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사를 나누어도 관중석 끝까지 전달될 수 있다.

관중석은 외곽까지 150m의 크기이며 각 단은 22개의 돌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약 26,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 연극과 문화예술이 공연되었는데 로마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

3단 구조의 이 원형극장의 각 단은 2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높이가 18m에 이른다.

2만 6천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어 세계에서 가장 큰 원형극장 중 하나이다.

 

헬레니즘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1-2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형극장 옆에는 광장시장과 셀주크도서관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에페소 시내에서도 가장 중심지인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한편, 이시기에는 원형극장 지을 때 전체 인구의 1/4이상을 수용할 수 있게 지어야한다고 했다.

2만6천명이 수용되었다는 원형극장은 인구 10명당 1명을 기준으로 건축되었다.

그래서 그때 인구를 약 10만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남자만 세는 거니까 실제로는 백만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성립도 된다.

 

 

 

 

관중석 사이사이에는 팔걸이까지 갖춘 넓은자리가 있는데,

 이것은 요즘의 특석으로 귀족들이 자리 했을 것이다.

입장료도 비쌋겠지...??

 

 

저 맨꼭대기에, 그리고 중앙무대에서 소리를 한 번 내보고 싶었다.

올라 갔다 가는 일행들과 시간이 안맞을 것 같아 그냥 그 자리에서 소리를 한번 질러 보았다가

주위분들 한테 구박만 받고 말았으니 이놈의 호기심이 문제다.

 

 

 

 

 

 

휴대폰 파노라마 기능으로 원형경기장의 모습을 몇 장...

 

 

 

 

 

 

 

 

 

 

 

 

 

 

 

 

 

원형극장을 나와 대리석으로 깔린 길을 걷자니 좌측으로 석관이 보이고,

 시원한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여름 휴가를 내어 이곳을 찾는 분들은 더위로 인해 고생 께나 하게 생긴 구조다.

4월 초순의 날씨임에도 따가운 햇빛이 부담스러웠는데,

한 여름 날씨에 사방은 대리석과 돌뿐이니 거기에서 발산되는 복사열을 어찌 견디겠는가??

아마도 관광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될게다.

땀으로 목욕을 할 것이 분명하다!!

 

 

 

 

후문인가??

지도를 참고하면 매표소에서 일자로 쭈욱 탐방이 이루어지고,

예전에 항구로 향하는 길로 나서면 또 하나의 출입구가 나온다.

 

, IN, OUT 게이트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형국으로 1.3km 길이에 있는 유적들을 만나고,

이곳으로 나오자 상점들이 많이 있고 한국말로 호객행위도 하고 있다.

제법 소란스러우니 관광지 다운 면모를 보인다.

정문 매표소의 한적함과는 차이가 있었다.

 

 

 

 

  에페소(Efes) : 에페소는 에게헤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이스탄불과 더불어 터키4대 관광지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 유적으로 2015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흔히 에페소라고 부르는 에페수스로 성경에 에베소서를 보낸 곳이라 에페소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은 로마시대에 지어진 도시로 산을 깍아서 만든 도시로, 산 밖에서 보면 여기에 도시가 있을 것이라고 보여지지 않는 단다.

   에페소는 이즈미르(Izmir)로부터 74km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울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을 타고 온 토사가 항구를 메워서 지금은 항구역할을 하지 못하고, 바다는 에페소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BC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해방되었다.

 대왕이 죽은 후  에페소는 대왕 휘하의 장군 리시마코스(Lysimachos BC 361 ~ BC281)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리시마코스가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로마의 소아시아 서부지역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오늘날 발굴되는 에페소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BC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의 실라(Sylla)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아우구스투스 황제(BC27AD14)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후 1세기 에페소는 그리스도교인 들에게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스테파노의 순교이후 AD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오로는 그의 2, 3차 전도여행때 에페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리고 교회를 세웠다. 또한 사도 요한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AD 431년 이곳에서 공의회가 열려서 성모 마리아가 "Mother of God"이라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결정을 내린 곳이다.

또한 묵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에페소,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티아티라, 베르가문, 스미르나)가 모두 이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다

   양항(良港)을 끼고 상업중심지로 발전했으며 BC 620년경 이곳에 세워진 아르테미스신전(神殿)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많은 순례자를 끌어 모았었다. 이곳은 BC 7세기~BC 6세기가 최성기(最盛期)로서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페르시아 전쟁으로 해방이 된 뒤에는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대왕 원정 뒤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하였다. 1세기 성바울은 이곳에 그리스도교를 전하였으며(54, 55~57) 또한, 로마에서 이 지방 신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이 도시의 폐허에서는 수많은 유적이 발굴된다.

   사도 바울의 선교무대였었고 아시아 최초의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가 실재했던 고대도시 예페소였다. 그러나 오늘의 에페소는 지도상에는 없는 수많은 유적들만이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는 사라진 도시이다. 고대도시 예페소가 있었던 현재의 위치는 이즈미르주의 셀죽 지역으로 터키의 서남부지역 에게해 부근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에페소 유적은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더대왕 휘하의 리시마우스 장군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비씨 1050년경 그리스 이주민들이 고대 항구도시 에베소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발전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최고의 황금기를 누린 에페소는 당시 소아시아주의 수도이자 최대의 항구도시로써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는 인구가 20만 명을 넘기도 하였는데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적도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로 판명이 되고 있다. 당시 에페소는 비옥한 평야이자 동서양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무역의 도시이자 유행과 향락의 도시로 2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과 음악당, 목욕탕, 여관, 도서관(두란노서원)에다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자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알려진 아데미신전(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등이 있었던 대도시였다

 

 에페소는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도시로, 사도 바울이 세 번씩이나 전도여행을 하였고, 3차 선교여행 때에는 2년이나 머물며 두란노서원 등에서 열변을 토하며 사역을 하였던 중요한 곳이다. 성경에서 에베소로 불리는 셀죽은 누가 바울, 요한, 마리아 등과 관련이 있는 도시로 사도 바울은 2차전도 여행시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벌인 적이 있으며(18:19-21), 3차전도 여행에서는 2년간이나 머물며 사역을 하였(19:1-10)으며 2, 3차 전도여행 때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또한, 사도요한과 마리아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64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자 사도 요한은 그를 대신하여 에페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버가모, 서머나 등지에 선교활동을 하다가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로마황제 도미티안이 암살되면서 요한도 유배지에서 풀려나 이곳으로 돌아와 지내다 일생을 마쳤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페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곳에는 페허가 된 세인트 존스 바실리카(St. John's Basilica), 예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의 집과 아테미스(Artemis)가 있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태풍 등으로 인한 퇴적작용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가 되면서 고대도시의 영화는 조용히 사라져갔고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도시가 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