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산문 입구부터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나무 크기가 흔히 듣던 백두산 원시림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어보니 1980년대 후반 동해쪽에서 올라온 태풍에 대부분의 큰 나무들이 피해를 입었단다. 지금의 나무들은 그 이후에 다시 자란 나무들로, 1980년대의 원시림을 회복하려면 20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하니 가꾸기는 힘들어도 피해 받기 쉬운 것이 숲인 것 같다.
셔틀버스가 올라가자 초원이 나타난다. 해발 2,000m 수목한계선을 넘어서니 나무는 없고 풀과 야생화들의 천국이다.이 초원이 백두산 특유의 독특한 풍광들을 만들어 낸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길은 대략3가지 코스이다.
가장 많이 이용하는 북파 코스, 그리고 서파 코스, 그리고 얼마 전 새로 열린 남파 혹은 두만강 코스 등이 있다. 물론 이 모든 코스는 중국쪽에서 오르는 백두산을 말한다. 북한을 통해 백두산 장군봉에 오를 날은 언제일까?
1,400여개의 계단을 오르니 천지가 얼굴을 드러낸다. 일 년에 두 달 정도 천지가 보인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천지라는 이름은 산 정상에 있는 호수에만 붙인다. 중국 전역을 통틀어 보면 천지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세 곳 있다. 워낙 날씨변화가 심해 구름이 꼈다가 사라지고,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하여간 변화무쌍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중국쪽에 속하는 백두산이다. 천지는 전체면적 중55%가 북한에 속하고45%가 중국에 속한다. 이것은1962년 김일성과 주은래 사이의 조중국경변계조약에서 확정되었다. 앞서 설명한 압록강의 섬들도 이 조약에 의해 국경이 확정되었다.
두만강을 포함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천지의 면적은 북한에 55%가 속하게 되었고 압록강 두만강 수계의 섬451개 중 북한이264개 중국이 187개를 나누어 가진다. 그런데 면적으로 보면 압록강 두만강의 섬 전체 면적의 86%가 북한으로 14%가 중국에 속하게 된다. 즉 대부분의 큰 섬들은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나라와 분쟁을 겪고 전쟁도 불사하며 영토문제에 관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중국이 어떻게 북한과는 이런 영토조약을 체결했나 이상할 지경이다. 8~90년대 북한이 6.25전쟁 참전의 대가로 백두산 영토의 상당부분을 양보했다고 멋대로 떠들던 우리나라 일부 언론도 있었다. 사실 이 조약에 대한 내용도 2000년 카톨릭대 안병욱 교수가 연변의 고서점에서 조중국경변계조약이 실려 있는 문건을 찾아낸 이후에 알려진 것이다.
조중국경변계조약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러면 왜 중국은 북한과 이런 영토조약을 맺었을까? 몇 가지 원인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중소국경 분쟁에 이은 사회주의 패권다툼의 영향으로 보인다. 50년대 말 우수리 강 유역의 영토문제로 전쟁까지 치른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60년대 내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북한은 이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 외교를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얻어 낸다. 특히 마오쩌둥은 정치 외교 안보적인 이해관계상 북한을 중국편으로 남겨놓기 위해 많은 물자를 지원한다. 이른바 3대 전략물자라 해서 경제적인 계산은 하지 않고 매년 석유150만 톤, 식량 100만 톤, 코크스탄(석탄) 500만 톤 정도의 지원을 하게 된다.이 줄타기 외교 속에서 열린 국경협상이었고 중국은 소련을 의식해 상당부분 양보한 속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의 협상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주 은래를 북한으로 불러들여 협상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간도협약문제를 제기 한다. 우리 땅을 일본이 중국에 넘겨주었으니 그 조약부터 무효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중국이 일본과의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북한의 주장을 인정해줄 리는 없으나 협상의 과정에서 일정 정도 양보를 얻어내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960대 북한은 경제 발전 성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 우리의 국민소득은 87달러였다. 반면 북한은148달러로 우리보다 1.6배 이상 잘 살고 있었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일정정도의 성공과 소련, 중국 및 동구권의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도움이 많이 있었다. 이런 자신감으로 조중국경변계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정하자고 먼저 제의한 것도 북한이었다.
이런 몇 가지 원인으로 조중국경변계조약은 북한에게 유리하게 체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영토에 관해 불리한 조약을 체결한 한 이유로 중국은 이 조약의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붙인다. 중국에서 이 조약에 대한 문건이 발견된 것도 1999년이 되어서이다. 때문에 우리도 북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천지를 비롯한 북한과 중국의 국경문제는 있는 사실 그대로 보아야 될 것으로 여겨진다.
백두산은 정상부근의 회백색 장석과 눈 때문에 사시사철 하얗게 보인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백두산의 중국 이름인 장백산도 같은 뜻이라고 한다.
<사진 : 백운봉 ~ 소천지>
▼ 백운봉 정상 기념(현지 산행 가이드 몰래 플랜카드를 품고....)
동계올림픽 숏트랙에서 우승한 우리 낭자군들이 백두산이 우리땅이란 글자를 들고 시상대에 올라 선 것이
중국에서 큰 문제가 되어 태극기등 일체의 풀랜카드를 배경으로 사진퐐영을 정부당국에서 금지시키었다 했다
추후 이런 저런 사진을 근거로 한국에서 중국령의 백두산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라 함.
▼ 백운봉 천지 관광을 끝낼 무렵 가스가 다시 몰려 오기 시작하여 천지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 백운봉에 바라본 녹명봉 방향(트레킹 진행 방향이다)
▼ 백운봉의 오르 내림길에서는 미끄럼으로 걷기 곤란한다.
▼ 녹명봉 가는 길에서의 천지
백운봉 운무를 감상하고 녹명봉을 접수하러 발걸음을 옮기어 갑니다.
비교적 평탄한 길에 탁트인 전망!!
운무와 어우러진 천지를 우측에 두고 바라보며 걷는 산책로 같은 등로를 즐기며 나아가게 됨니다.
발 내딛는 곳마다 포토존입니다.
이곳엘 또 온다는 보장도 없고 거북이산행 하는 일행들이 있으니 한껏 즐기면서 진행을 하였지요
▼ 북한지역의 장군봉과 연구소등 북한 시설물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된다.
장군봉을 단독으로 잡았지요.
장군봉 우측에 보면 물가까지 흰선이 있는데 그것은 천지에 내려가기 위하여 북쪽에서 만들어 놓은 계단이고,
물가에 흰점이 보이는데 그것도 북한에서 만들어 놓은 건물로 천지를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람니다.
북측에서는 저곳 장군봉까지 케이블카를 조성해 놓았다 하니 통일이 되면 저곳을 꼭 가고 싶읍니다....
▼ 녹명봉 오름길에서...
녹명봉은 고도 2603로 산아래에 분지가 있는데 그곳에 7 ~ 8월이 되면 짝짓기를 하기 위하여 사슴들이 몰려 오고
숯넘들의 암놈 쟁탈전이 벌어저 뿔을 부딪히며 경쟁을 하는데 그 뿔부딪히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하여
녹명봉이란 이름을 얻었지요.
이 부근에서의 경관은 한편의 파노라마와 같은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장쾌한 절경의 연속이람니다.
이제는 마지막 봉우리인 차일봉을 접수 할 차례입니다...
▼ 광활한 초원은 제 마음과 정신도 넓게 만들어 주는 기분이었지요.
▼ 사진상 젤로 멀게 보이는 곳이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북파(달문방향) 입니다.
역쉬나 경치가 쥑여 줌니다.
마지막 봉우리인 차일봉은 별다른 특징없이 작은 둔덕 같은 모양새로 이젠 내리막 길만이 우리 앞에 있었지요.
간식을 나누어 먹고 쉬며 가며 하산을 시작 합니다.
▼ 별 특징없는 차일봉은 스치듯 우회하여 북파 하산길.....
이제 힘든 코스는 다 지나 왔으나 후미의 속도가 너무나 늦어 조금은 지루한 산행이 되어 가나 마음껏 백두산을 음미 하며 진행했다.
▼ 북파의 천지!!
▼ 북파 인근의 초원지대
▼ 북파에서 아내외 만세를 외치어 보았다.
드디어 북파 끝에 섯읍니다.
천지 건너 제일 멀리 보이는 곳이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 서파입니다.
헤어져야 하는 천지가 아쉬어 마님과 인증샷을 한장 더!!
▼ 북파에서 바라본 천지!!
▼ 백두대간 동호회 회원들과 기념!!
▼ 후미 전체를 기다려 주어 전원이 함께.....
천지와 이별을 한 후 하산길에 또 비가 내리었읍니다.
이곳 기후는 해가 반짝하다가도 언제 비가 내릴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우리 일행도 산행중 우비를 세번이나 입어야 했읍니다.
▼ 소천지로 하산을 한다.
이곳 북파에서 달문방향으로 직진하여 장백산으로 향하는 루트로 가려 했으나 힘들어 하는 후미로 인하여 소천지로 갈 수 밖에 없었다.
▼ 하산길에 만난 백두산의 빙산(삼복더위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녹지 않고 얼음이 존재했다)
▼ 하산길의 초원지대
▼ 하산길의 텐트 노점상 :
비가와서 날이 차가워지고 체온이 떨어질 무렵 듕국사람들이 막사를 지어 놓고 커피를 팔고 있은 간이휴게소를 만났읍니다.
울나라 커피믹스를 한잔에 천원씩 받더군요.
그냉 지나칠 수 없었지요.
꿀맛 같은 커피맛을 보았겠지요??
아~~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았읍니다.
구름 너머로 장백폭포가 보이는 곳인데 신의 질투로 구름이 지워지지 않읍니다.
그나마 다행히 저를 포함한 선두 서너명만이 간신히 장백폭포를 보았읍니다.
그것도 약 4~5초간의 짧은 시간만 허락 되더군요.
아내에게 장백폭포를 보여 주려고 한시간여를 이곳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헛수고였읍니다.
폭포물 떨어지는 소리는 요란한데....
결국 울 마님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듣고 왔읍니다. ㅋㅋㅋ
기다리며
쳐지는 체력으로 여기까지 무사히 따라와 준 마님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 옥류폭포
▼ 옥류폭포가 보이는 곳에서 가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장백폭포를 기대하며 후미를 기다려 주었다.
의사팀원중 한 분이 넘어져 부상을 당했단 소식에 그냥 하산을 할 수 없었기에...
▼ 수목한계선을 통과한다.
이런 오솔길도 지납니다.
허지만 이 오솔길을 지나면 아주 급한 내리막길도 있지요
▼ 등로는 내린 비로 습기가 많아 질척거려 조금은 귀찮았지요.
▼ 소천지 : 빙산 녹은 물이 흘러 들어 특이한 물색을 보여 주는데 물에 비친 나무가 이채롭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볼거리 "소천지"입니다.
만년설이 녹아 내린 물이 이곳에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 놓았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소천지라 부른답니다.
이것으로 백두산 트레킹(거리 17km)을 마치었읍니다.
▼ 트레킹 다음날 아침에 촬영한 백두산 산문입구!!(산행 다음날 아침에 촬영)
산행 날머리 입니다.
보틍사람들이 백두산을 간다하면 이곳을 통해서 달문에 있는 장백폭포만 보고 오지요.
1박 2일 촬영지에 나왔던 코스로요.
하산후 온천욕으로 피로를 풀고 천지에서 떠 내려왔다는 송어(산천어??)를 안주 삼아 하산주를 거하게 하였읍니다만
맛은 별로 였읍니다.
아무래도 듕국인민들에게 사기 당한 느낌입니다.
돈만 엄청 비싸게 받아 먹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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