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길 1차 백악, 낙산 구간
참석자 : 성봉현, 조한근, 김창주
산행거리 : 트랭글 측정거리 : 8.6 km
산행시간 : 5시간 19분 (시작 11:16분, 종료 16:35분) - 휴식시간 1시간 05분.
실 산행시간 : 4시간 14분
평균속도 : 1.9km
날 씨 : 맑 음
접 근 : 지하철 3호선 3번출구 → 시내버스 7022번 부암동 윤동주 문학관 하차
주요구간별 소요시간 : 들머리(창의문 입구/윤동주문학관) 도착 : 11:07분
11:16분 백악구간 출발
11:17분 창의문(자하문) 또는 북소문
11:20분 창의문 안내소(통행패찰 수령)
11:32분 돌고래 쉼터
11:45분 백악쉼터
11:56분 백악산(고도 : 342m, 1.1km 지점)
12:02분 1. 21사태 소나무
12:07분 청운대(쉼터)
12:15분 청운대 안내소 갈림길(외성길 이용)
12:24분 곡장(2.1km)
* 중식/52분 소요 : 12:31분 ~ 13:22분
13:24분 북악 팔각정 갈림길/팔각정 안내소(알바 3분)
13:43분 촛대바위
14:05분 숙정문(2.9km 지점)
14:13분 말바위 전망대/삼청터널 위(3.3km 지점)
14:19분 말바위 안내소(통행패찰 반납)
14:29분 삼청공원 안내소 갈림길
14:40분 와룡공원
14:54분 성북동 북정마을 갈림길
15:02분 암문
15:04분 창경궁 갈림길
15:14분 서울국제학교
15:18분 돈가스 골목(5.2km)
15:25분 경신중고교, 천주교한국외방선교회
15:38분 혜화문/동소문(백악구간 종료/낙산구간 시작, 6.1km 지점)
15:59분 낙산공원 입구(장수마을 안내석/삼군부 총무당 안내판)
16:13분 낙산공원 정상
16:20분 이화동 벽화마을 갈림길
16:35분 흥인지문(8.6km 지점)
한양도성(漢陽都城)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위해 축조된 성으로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의 주위를 둘러싼 성곽과 문을 일컫는 말이다.
1396년(태조5년)에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차레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랜 기간(1396년~1910년,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개보수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양도성의 성벽은 군데군데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시기와 축성기술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은 4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4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었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 되었고 숙정문, 광희문, 혜화문은 다시 세워졌다.
서울의 울타리 역할을 한 한양도성은 서울시민의 일상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한양도성길은 창의문(자하문)에서 시작해 혜화문까지 이르는 ‘백악구간’부터 혜화문에서 시작해 흥인지문공원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르는 ‘낙산구간’, 돈의문터에서 시작해 인왕산 순성길을 지나 창의문까지 이르는 ‘인왕구간’ 등
총 6개 구간,약 18.6km의 길이 성벽과 순성길을 따라 둥글게 연결되어 있다.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은 객관적인 높이 자체는 높지 않지만 서울이 낮은 평지가 많다 보니 꽤 경사가 있다.
특히, 북악산을 창의문(북소문)쪽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고도차이 200m를 670개의 계단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급한 마음 없이 산책하는 기분으로 무리하지 않게 북악에 오르면 북한산 능선과 잠실, 남산, 관악산을 포함한 서울의 본 모습을 만날 수 있는 보상을 받게 된다.
길이가 상당히 긴편에 속하는데 한양도성의 총 길이는 18.627㎞이고 현재 길이는 12.344km이다.
해외의 도시성곽과 비교해보면 세계 최장의 성은 중국의 남경성으로 총 길이는 약 34km이고, 현재 길이는 약 25km이다.
비교해 보면 길이가 남경성의 절반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긴 성벽으로 역사상 총 길이가 약 19km였던 로마시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나 그보다 더 거대했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비잔틴)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한양도성보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가장 두꺼운 삼중성벽 부분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경우 3분의 2 정도 남았지만 한양도성의 현재 길이보다 약간 짧다.
과거 춘추전국시대 중국 최대의 도시였던 임치의 성벽둘레는 21km였고,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36.7Km에 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고고학 조사를 통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국내에 소재하는 도시 성곽과 비교해보면 개경 나성은 길이가 약 16km, 개경성 총길이는 23km로 더 길고, 평양성은 총 길이가 약 16km로 약간 짧으며 성벽의 총 연장길이까지 따지면 약 23km로 더 길다. 태봉국 철원성은 총 길이가 약 12.6km이며, 수원 화성은 총 길이 약 5.5km이다.
특히,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도성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514년(1396 ~ 1910) 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순성길이란 양반네 들이 과거급제를 빌면서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순성놀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대문부터 살펴보면 북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숙정문(북대문, 사적 제 10호), 흥인지문(동대문, 보물 제1호), 숭례문(남대문, 국보 제1호), 일제에 의해 철거된 돈의문(서대문, 새문, 신문)이 있다. 그리고 각 사대문과 사대문 사이에 사소문이
있는데 시계 방향으로 숙정문과 흥인지문 사이에 있는 혜화문(동소문, 1992년 복원), 광희문(수구문, 시구문, 남소문, 1975년 복원), 소의문(서소문, 일제에 의해 철거), 창의문(자하문, 북소문, 보물 제1881호)가 있다.
<한양도성 축약지도>
<사대문과 서소문 위치도>
<사대문과 사소문 이야기>
사대문(四大門) : 조선시대 도성에서 정동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정서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정남의 숭례문(崇禮門), 정북의 숙청문(肅淸門, 1523년 이후 숙정문으로 개칭) 등 4개 성문을 말하며, 유교의 가르침인 '인, 의, 예, 지, 신'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흥인지문은 태조 때 도성을 수축하면서 건설되었는데, 1396년(태조 5) 1차 축성 때 경상도 안동과 성주 사람들이 동원되어 동대문 일대의 축성 공사를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 4월에 완공되었다. 이어 1451년(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한양 도읍지 우백호에 해당하는 낙산을 포함하여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년(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 하였다고 한다.
동대문의 층루(層樓) 목조 건물은 이때 새로 지은 것인데, 조선왕조 말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건축양식의 시대적 변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돈의문의 현판은 창덕궁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글씨는 조일회(曺一會)가 쓴 것으로 전하는데, 최근에는 그의 재종손 조윤덕(曺潤德)의 썼다고도 한다.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산에 해당 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를 따랐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사소문(四小門) : 조선 시대, 서울 사대문(四大門) 사이에 나 있던 네 개의 작은 문. 곧 북동의 혜화문(惠化門), 남서의
소의문(昭義門), 남동의 광희문(光熙門), 북서의 창의문(彰義門)이다.
에필로그 : 평안남도 평양시 선교리가 고향이신 아버님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군 삼묘리(고구려 벽화가 발견된 곳)가 고향이신 어머님께서 6.25 전쟁시 1.4 후퇴 대열에 동참하여 남녘 땅으로 피난을 내려 오시게 되었다.
그 덕분에 과거에는 서대문구 현저동이었으나, 지금은 종로구 무악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인왕산 자락에서
(서대문형무소 건너편) 내가 태어났다.
한때는 자하문(우리 어렸을 적에는 내 주위의 인물들 모두 단 한번도 창의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여기에는 자하문으로 표기한다.)밖 부암동에 거주하며 청운국민학교를 다녔었는데, 그때 통학시 이용했던 도로가 바로 자하문 을 관통하는 도로이다.
1.21 사태 때는 들려 오는 총소리에 놀라 전쟁이 났다 하면서 안방 이불속에 폭 숨어 있었던 기억이 새롭게 회자된다. 김신조가 체포된 곳은 우리집 뒷산(인왕산) 이었다. 그러니 오늘 시작하는 한양순성길 시작점은 초등시절 나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초등학교 2 ~ 3학년 시절 우리 집과 마주 보고 있다 시피한 석파정을 수시로 드나들며 놀이터로 삼았던 때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서너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석파정 관리인 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왕산 자락에 기대여 자연을
벗삼아 온갖 개구쟁이 짓을 늘상 함께 하였으니, 석파정에는 아무런 제지 없이 당당하게 드나 들며 놀이터로 삼았었다. 그 시절에는 그냥 멋진 한옥집이라 판단했던 나의 놀이터가 대원군 이하응의 별채인 석파정었다는 것이 지금은 신기하기만 한 것이다.
그 때 그 시절 내게 보였덕 석파정은 그냥 오래 되어 보이고, 넓은 정원과 잘 어우러진 대궐 같은 그냥 한옥집으로만
판단했었는데, 그래도 석파정 고택 건물 한켠에 않아, 하늘 높이 올려다 보이는 기와집과 멋진 자태의 노송을 바라보자면 웬지 기가 죽기도 했었으니 그 울타리 안에만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정숙해 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관리인 아저씨(친구 부친)가 매우 무서운 성정을 갖고 계시여 기가 죽기도 했었다. 그분이 무엇하는 분이었지 이글을 쓰면서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한 때는 흥인지문 구간 마지막 코스인 장충동에서도 몇 년 살았던 적이 있었으니, 나는 유년, 청춘시절을 나도 모르게 한양순성길에 기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철 함박눈이 펄펄 쏱아져 온 대지를 하얀색으로 그려 놓은 날에는 자하문 고갯마루에서 지우산 손잡이로 만든 대나무 스키(??)를 타고 놀던 기억, 지금은 서울미술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석파정에 있는 연못에서 물놀이를 하고, 고택주변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노송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던 초등시절의 감흥을 회상하며 남들과는 정서적으로 차별화 되는 마음으로 봉현, 한근과 함께 자하문을 시작으로 한양순성길탐방을 시작해 본다.
1구간 : 백악(북악)구간/창의문 ~ 혜화문(6.1km, 4시간 22분/휴식시간 포함)
창의(자하)문부터 혜화문까지의 순성구간으로 순성 길중 가장 높은고도(342m, 인왕산은 338.2m)의
북악산을 지나는 구간으로 한양 순성길중 인왕산구간과 더불어 난이도가 가장 높은 구간이 되겠다.
한양 땅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북악산과 청운대를 지나며 북한산 능선을 좌측에 두고 어깨를 나란히 하듯 진행되니
서울 북쪽의 모습과 사대문 안쪽 도심의 모습
그리고 남으로 남산과 관악산 등의 멋진 모습을 관찰하며 산행이 진행된다.
곡장 부근부터는 서울의 동북 방향 즉, 수락산 ~ 불암산 ~ 망우산 ~ 아차산 ~ 용마산 등을 마주 바라보며 진행되고,
발 아래로는 삼청동, 성북동 방향의 민간주택들을 만나기도 한다.
백악산을 지나며 ‘1.21 소나무(68년 무장공비 침투 때 생긴 총탄 흔적)’도 볼 수 있는데
창의문 안내소-말바위 안내소 구간의 순성길은 탐방시간과 출입구에 제한이 있다.
이 부근은 청와대 뒷산에 해당하여 1968년 김신조 일행이 침투해온 루트로 보안상 중요한 곳이기 때문으로
1.21사태 이후 40년 동안 민간인 통행불가 지역이었던 이곳은
2007년 4월 탐방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창의문과 말바위 안내소 2곳 에서만 출입이 가능하며,
각 안내소에서 방문 표찰을 받아 항시 목에 걸고 다녀야 한다.
이 백악구간의 개방시간은 하절기는 09시부터 18시까지(입산은 16시까지),
동절기는 09시부터 17시까지(입산은 15시까지)였었으나,
2019년 4월 5일부터 탐방시간이 확대 개방되었다.
겨울(4개월, 11~2월)은 09시부터 17시, 봄가을(4개월, 3~4월/9~10월)은 07시부터 18시,
여름(4개월, 5~8월)은 07시부터 19시까지이다.
시에 탐방 절차가 간소화 되어, 신분확인 절차가 생략되어 바로 표찰을 내어준다.
혹자들은 이 구간에서는 사진촬영이 불가하고,
사복군인들이 항시 감시를 하고 있다 하였지만,
나의 경우 사진 촬영하는데 지장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각 휴식터 마다 사복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등산객들에게 큰 불편을 주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촛대바위, 숙정문 인근부터는 우리나라 고유의 소나무 숲길을 지나며 마치 산림욕 하듯 걷게 되고,
와룡공원부터는 민가와 가까워져 산책하는 이들과 합류하는 현상도 발생하는데
특히, 서울국제학교 인근을 지나면서 민간 주거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곳 한양도성의 훼손된 현장을 직접 확인하게 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혜화문을 내려 서면 강북구, 도봉구 등 서울북쪽 지역을 도심으로 연결해 주는
혜화로(창경궁로)의 도로를 횡단해야 하는데
그 도로는 혜화동과 삼선동의 경계가 되는 것이고,
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바로 삼선동을 경유하여 낙산을 넘어 흥인지문에 도착하게 된다.
▼ 한근, 봉현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합류하여 인근 분식점에서 간식을 준비한후 7022번 버스를 이용하여 윤동주 문학관 앞 자하문 입구에서 하차하여 들머리에 도착한다.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내내 내가 3년간 학업을 했었던 청운국민학교와 그 주변, 부암동에서 통학을 했었던 옛길을 기억하며 들머리에 도착했다.
▼ 1.21 사태시 순직한 최경수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동상 그리고 자하문을 확인하면 산행준비를 하게 되고,
길 건너편 인왕구간의 하산로 방향인 윤동주 문학관 들머리도 확인을 해 본다.
▼ 11:16분 백악구간 출발
어린시절 우리는 줄곶 자하문으로 호칭했었던 창의문앞 계단길을 올라서면서 순성길 탐방에 나서게 된다.
동시에 나의 머릿속은 초딩시절 그때 그시절로 돌아간다. 아니다. 이미 경복궁역에서부터 나의 사고는 온통 그 시절로
이미 돌아 갔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 실로 수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창의문을 정겹게 확인하게 되고,
▼ 철책으로 조성된 펜스 문을 통과해야 한다.
▼ 철책을 통과하여 창의문 안내소에서 입산신고를 한후 통행패찰을 수령하면서 순성길 탐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패찰은 말바위 안내소에 반납할때까지 줄곶 목에 걸고 다녀야 한다.
혹자들은 이 구간에서 상당한 압박을 받으며 관리요원들에게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옛말이고, 지금은 사진촬영 불가지역 등에서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아무런 제지 없이 자유스런 탐방을 할 수 있다.
▼ 관리소를 지나자 마자 만나는 계단길은 670여 개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 계단길을 통해 고도를 200m 올려야 하니 순성길 시작부터 된비알을 통과해야 하는 형편으로 이곳은 순성길중 인왕산 구간과 더불어 난이도가 가장 높은 구간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 되겠다.
▼ 그 계단길에서 뒤를 돌아보자 건너편으로 인왕산 치마바위가 그 자태를 들어 내 주고 있고,
잠시후 백악산 정상부위를 올려 다 볼수 있게 된다.
▼ 11:32분 돌고래 쉼터를 만나고 연이서 11:45분에는 백악쉼터를 만나는데
된비알 계단길에서의 고단함을 풀고 가라는 배려로 쉼터를 연이어 조성해 놓았다.
▼ 이 바위의 모습이 돌고래를 연상시킨다 하여 돌고래 쉼터란 지명을 지여준 것으로 보이고,
이 쉼터에서 부터 북한산 능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순성길이 조성되어 있으니
북한산 능선의 빼어난 자태를 감상하며 계단길에서의 고단함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 11:56분 백악산(고도 : 342m, 1.1km 지점)
백안산 쉼터에서 11분간 진행하여 순성길중 가장 높은 고도를 갖고 있는 백악산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내가 살았었던 부암동과 그 너머로 보이는 서대문구와 은평구 등을 감상하며 잠시 숨을 고르게 되는데
벗꽃이 만발하여 눈호강의 즐거움까지 선사 받게 된다.
▼ 백악산을 뒤로 하고 다시 되돌아 내려 오는 길에서 앞으로 가야할 청운대 쉼터와
사대문 안쪽 종로 거리를 품고 있는 한양땅을 한 눈에 바라 보면서 이제는 내림길 계단을 통과해야 한다.
▼ 12:02분 1. 21사태 소나무
그 계단길 끝자락에서 우리에게는 무장공비 김신조로 더 알려졌던 1.21사태 소나무를 만난다.
이곳에서 바로 아래에 있는 청와대가 지척인 위치로 이곳까지 무장공비가 진출했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기만 한데
소나무에는 총탄자국을 선명하게 표시를 해 놓았다.
더불어 순성길은 1.21 소나무를 지나면 평탄한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다.
▼ 1.21 사태로 출입금지된 이후 순성길을 개방하게된 경위를 설명한 안내판과 안내지도판을 지나고,
▼ 12:07분 청운대(쉼터)
넓은 공터로 조성된 청운대에 도착하게 된다.
수목을 찾아 볼 수 없는 청운대에서는 사위의 조망에 잘터져 눈호강을 하게되는데
순성길은 여기서 성밖과 안쪽 모두 이용할 수 있게끔 조성되어 있어 그 안팎을 모두 확인하고
안쪽길을 이용하여 청운대 안내소 방향으로 계속진행 하였다.
▼ 공터를 가로 질러 진행하면 다시 숲길로 조성된 계단길을 만나게 되고,
앞으로 진행할 순성길을 만나게 되는데 성곽의 모습 끝에 곡장이 코앞에 펼쳐져 있다.
▼ 그리고 좌측으로 웅장하게 펼쳐져 바라 보이는 북한산 안내판을 확인하면서
안내판의 그림과 실제 모습을 일일이 비교하면서 그 실체를 학인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족두리봉 ~ 향로봉 ~ 비봉 ~ 사모바위 ~ 승가봉 ~ 보현봉 ~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은
한양땅에 기대에 살고 있는 수도권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모습이 되겠다.
▼ 12:24분 곡장(2.1km) : 중식 : 12:31분 ~ 13:22분/52분 소요
자하문에서 출발하여 순성길중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북악산, 그리고 1.21사태 소나무와 청운대 쉼터를 경유하여
곡성까지 1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급할것 없는 산책같은 분위기로 진행하는 순성길 탐방이다.
시간이 되었으니 배를 이곳에서 배를 채우고 가기로 한다.
다른 곳들에 비하여 인적이 드물어 한적한 장소가 이곳 곡장이었다.
걸음걸이 만큼 식사시간도 느그시 하다보니 거의 한 시간이나 소비하게 되었다.
▼ 곡장안내소(13:24분) 북악 팔각정 갈림길/팔각정 안내소(알바 3분)
막거리 탓이었나??
긴장이 풀린듯 곡장 안내소에서 아무생각 없이 진행하였더니 앗!!
오데로 가고 있는 거이지??
인왕스카이웨이 자리한 팔각정길로 발걸음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급히 빽하여 곡장안내소로 되돌아가 제길을 찾아 가게 된다.
▼ 뒤돌아서서 우리가 점심식사 했던 장소를 확인해 보고,
▼ 멋진 소나무와 쉼터 방향으로 나아가며 봄의 햇쌀을 즐기게 되는데
우리나라 고유의 성구조물인 '치'에 대한 안내판을 만나게 되는데
이 치는 고구려시대부터 내려 오던 우리민족 고유의 건축기술로 성을 공격해 들어 오는 적군을
삼면에서 방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계공법으로 알려져 있다.
▼ 여기서 한번 더 진행 방향의 전면을 확인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소나무 숲속 길을 만나게 된다.
▼ 13:43분 백암 촛대바위
잠시후 나무테크 계단 내림길을 만나는데 '백암 촛대바위'이라는 곳이다.
음~~ 어느 것이 촛대바위인고??
▼ 아!!! 바로 네 녀석이렸다??
그러나 촛대바위에는 나무테크가 걸림돌이 되어 범접을 할 수 없는 지형으로 인증만 하고 통과하면서.
계단 내림길로 내려 서야 했는데
촛대바위를 보호하듯 벗꽃은 그 수명이 다한 듯 지고 있는 모습과 잘 어우러진 바위모습이다.
그리고 이곳부터는 소나무 보호구역이라는 안내판이 위엄스럽게 조성되어 있었다.
▼ 그 계단 내림길에서 경복궁과 그 일대를 조망할 수 있게 되고,
뒤돌아 보면 인왕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게 된다.
▼ 그 계단을 내려오면 안부 쉼터를 만나게 되고,
14:05분 숙정문(2.9km 지점)
숙정문을 만난다.
한참을 온건 같은데 거리로는 채 3km가 되지 아니된다.
그만큼 거북이 산행으로 순성길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숙정문은 본디 숙청문으로 불리웠으며 풍수지리설에 상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날 수 있으니 문을 걸어 잠그고 사용을 하지 않았다는 성문이 되겠다.
그럼 애초부터 만들지 말것이지 힘들게 돈들여서 뭐하려고 만든 것인지 아리송 허다
▼ 그 숙정문을 통과하여 계속 성곽길을 따라 진행을 하게 된다.
주위풍경과 잘 어우러진 성곽길이 되겠다.
▼ 그 성곽길 넘어로 성북동 방향의 세속 모습이 들어 나는데 발 아래로는 그 유명한 삼청각이 자리하고 있다.
한때 기생집으로 유명했었던 바로 그 삼청각이다.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중요한 국사가 의논되고 결정되었었을까를 상상하면서 만감이 교차한 심정으로
삼청각을 바라 보았는데 그 위의 산 능선에는 벗꽃이 한참이다.
순성길 탐방 날짜를 잘 잡은 결과물이 되겠다.
▼ 우측으로는 한양땅을 넘어 잠실의 'XX호텔' 모습도 조망이 되고 이었다.
혹자들은 이리 말하고 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저 호텔의 조망여부에 따라 싸고 비싸고가 결정된다나 어쩐다나....
▼ 14:13분 말바위 전망대/삼청터널 위(3.3km 지점)
드디어 오늘 탐방길중 중요 포인트중에 하나인 발바위 전망대를 만난다.
이 말바위 전망대는 서울시에 선정한 우수조망 명소이고 이곳에서
삼청공원과 와룡공원 두 갈림길을 만나는 중요길목이고 순성길은 당연히 와룡공원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삼청공원 방향으로 진행하여도 순성길로 다시 진입할 수 있는 등로가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우수조망 명소에서 한양땅을 감상해 본다!!
▼ 조금전에 확인했던 삼청각과 그 지능선을 우선 확인하고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 성북동 살림집들 넘어로 불암산 ~ 수락산 능선이 병풍처럼 휘돌아 가고,
▼ 계속 우측 방향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차산까지 확인이 된다.
▼ 14:19분 말바위 안내소(통행패찰 반납)
눈호강을 마치고 몇걸음 내려 오면 말바위 안내소를 만나고,
이곳에서 자하문 안내소에서 받은 통행패찰을 반납하게 된다.
▼ 말바위 안내소를 통과하면 복잡한 삼거리 길을 만나지만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별 문제 없이 제길로 찾아 갈 수 있는 형태이고,
급한 나무계단길을 만나게 된다.
▼ 아~~~ 이 이정푠 머하자는 고야??
너무 복잡하자너~~~~!!
어짹거나 아무리 복잡해도 우리는 '와룡공원' 바로 욜루로 진행하면 정답!!
그러니 다른 지명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는...
▼ 복잡한 교차로(??)를 통과하면 착해진 등로를 만나게 된다.
▼ 그 평탄한 길에서 갑자기 우측 계단 오름길이 등장하는데 그 길이 바로 순성길이 되겠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진행하면 아무런 문제가없다.
가자!! 와룡공원으로~~~~
▼ 그 계단길을 올라 서자 체육시설이 등장하면서 '취병'이라는 처음 보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취병이란 조선시대 식물을 기본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는 해설판을 만나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민가와 가까워지니 계속 갈림길이 등장하지만 그때마다 이정표에 나와 있는 순성길 안내를 받으며
진행하면 되겠다.
▼ 이어서 '성북동 성곽길 조망지점'을 만나는데
야간에 산책삼아 이곳에 들르면 좋을 것이다라 상상하지만 언제 이곳을 다시 올수 있을까??
그 확율이 떨어진다!!
▼ 그 조망터를 벗어날 무렵부터 순성길은 민초들과 어우러진 형태를 보여 준다.
속세의 민낯과 성곽길이 어우러져 그 성곽에 기대여 살아가는 민가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게 된다.
다소 혼란스런 순성길이다.
아직 도심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 15:02분 암문
그 혼란함 속에 자그마한 암문을 지난다.
암문은 그야 말로 개구멍이 되겠다. 전시에 적군 모르게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그런 문이다.
그 암문을 지나면서 민초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 그러면서 와룡공원을 지나게 되고,
▼ 순성길 탐방객이 아닌 일반인들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 15:14분 서울국제학교 뒷문 앞을 통과하고,
다시 본 모습을 찾은 성곽길을 만나는 가 하였지만...
▼ 15:18분 돈가스 골목(5.2km)
서울 장안에서 유명한 돈가스 골목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훼손된 성곽길을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 부터 길조심 구간이다. 왜냐?? 성곽이 없어졌으니...
잠시 고민하고, 주의를 기우리면서 순성길을 찾아 가야 했다.
그러나 순성길을 찾아 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마디로 길바닥의 이정표를 잘 보고 가면 된다. 만약, 이 표지가 5분이 보이지 않는다면
잘못된 길로 진입한 것이니 그 표지가 보이는 곳까지 되돌아가 그 표지를 다시 찾아 보면 되겠다.
그리고 아래 사진들에 나와 있는 건물들을 기준으로 진행하면 큰 문제가 없겠다.
▼ 전봇대에도 그 표지가 부착되어 있으니 알바할 걱정은 NO. NO. NO
▼ 15:25분 경신중고교, 천주교한국외방선교회
한근이 다녔었단 경신중학교와 그 건너편에 있는 천주교 한국외방 선교회 골목길을 휘적휘적 걷다 보면,
▼ 이런 이런 이런 이런제길...
이 부근부터는 아예 성곽을 축대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들이 등장한다.
누구던 이 현장을 만나게 되면 참담해 지는 심정이 되겠다.
▼ 접입가경!!
이제는 건물과 건물사이에 낡아 빠진 철문으로 들어가야 순성길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훼손돈 성곽길을 계속된다.
▼ 그나마 다행히 정갈하진 성곽길을 만나더니,
▼ 15:38분 혜화문/동소문(백악구간 종료/낙산구간 시작, 6.1km 지점)
혜화문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까지가 백악구간이고 낙산구간으로 진입하는 경계지점이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혜화문의 이곳 저것을 확인하게 된다.
▼ 그 혜화문을 내려 서면 이제는 도로를 횡단하여 건너편을 넘어 가야 하는데 중학시절 통학로 였던 혜화로가 되겠다.
2. 낙산구간/혜화문 ~ 흥인지문(2.5km)
혜화문을 통과하는 창경궁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낙산 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
북악산 구간이나 인왕 구간에 비하면 비교적 완만하고,
야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백악구간과 비교하여 도심구간을 지나야 하고,
장수마을 카페나 외부 순성길의 도성은 일몰후
어둠이 내린 이후에는 조명을 받은 성벽의 모습과
서울 도심의 야경이 어우러져 몽환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와룡공원, 낙산공원 등은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기에
인근 주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모습도 쉽게 만나 볼 수 있고,
한양땅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을 향하는 길목에는 이화동 벽화마을 그리고 대학로로 연결되는 길이 나 있어
젊은 청춘 남녀들의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인 환경을 갖고 있다.
▼ 낙산구간으로 진입하는데 혜화로 횡당보도를 건너 나무계단 길로 올라 서야 한다.
▼ 혜화로를 건너 뒤돌아 본 혜화문 모습이고, 진행방향으로는 본 모습을 되찾은 성곽길을 만나게 된다.
▼ 낙산공원에서 뒤돌아 보면 북한산의 자태를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제는 그 거리가 한참 멀어져 있다.
▼ 삼선동 369 성곽마을 이야기 안내판을 만나 재개발에 밀려난 없이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 아프게 생각하게 하고,
▼ 철쭉과 어우러진 성곽을 만나는데 이곳에서 '각자성석'이라는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각자성석은 성곽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 마다 그 돌을 쌓은 작업자의 이름을 새겨 넣어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인데
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에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라 알려져 있는 방식이 되겠다.
▼ 15:59분 낙산공원 입구(장수마을 안내석/삼군부 총무당 안내판)
이제부터 본격적인 낙산공원 입구길이 되겠다.
장수마을 안내석과 삼군부 총무당 안내판을 지나면서 완만한 오름길로 조성되어 있고,
이제부터 만나는 낙산은 풍수지리상 좌청룡에 해당한다는 안내판도 조성되어 있었는데
조선시대때 이 낙산 인근에는 중인, 그리고 하급관원 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 16:13분 낙산공원 정상
가족들과 연인들, 그리고 친지들과 낙산을 찾아 즐기는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다소 혼잡스럽게 낙산 정상에 오른다.
여기서 한번 더 한양땅을 즐기게 되는데 순성길을 외곽과 내곽 모두 통행이 가능하였는데
우리는 내성길로 흥인지문을 향해 진행했다.
▼ 16:20분 이화동 벽화마을 갈림길
갈림길 주의구간이 되겠다. 깜빡하고 우측골목길로 진행하면 이화동 벽화마을로 내려 가게 되기에..
그냥 성곽을 따라 쭈욱 가면 되는데 좌측은 성곽이요, 우측은 일반 건물들이 촘촘이 들어 서 있는 묘한 구간이었다.
▼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흥인지문을 발아래에 두는 지점까지 도착하게 되고,
잠시 후 한양도성 박물관 앞을 지나지만 코로나로 인하여 관람이 중지 되어 있으니 아쉬움을 삼키게 된다.
▼ 16:35분 흥인지문(8.6km 지점)
자하문에서 출발하여, 수 많은 계단길을 오르고 내리고 하여 흥인지문에 도착하였다.
추억의 백악구간, 낙산구간을 마치게 된 것인데 나머지 구간을 언제할까??
머 급한 것 없으니 날이 시원해 지길 기다려 보자!!
사실 오는 낮에는 더위와 싱갱이를 좀 했으니 말이다...
흥인지문에 도착하여 본디 계획했던데로 광장시장 먹자골목으로 이동하여
하산주를 거나 하게 하고 귀가하게 되었다.
나는 이날 꼴벵이가 되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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