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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유 럽 6 국

제 7 일(8월 10일, 일요일) 4. 바사박물관

 

7 (810, 일요일) 4. 바사박물관

 

<노랑풍선 일정표> 스톡홀름 시내관광후 바이킹라인 또는 실자라인 탑승하여 핀란드 투르크로 이동:11시간

스톡홀름(스웨덴)으로 이동하여 시청사 전경, 대성당과 구시가지 전경, 바사호 박물관 및 시내관광

호텔식, 현지식, 선상식

 

<실 제 일 정 표>

06:59분 기상

08:01분 아침식사

09:23분 호텔출발

11;14분 맥도날드 매장 휴식

13:14분 스톡홀름 시내 진입

13:32분 중식

 

14:23분 스톡홀름 시청사

 

16:14분 스톡홀름 대성당, 구시가지, 피의사원

 

17:06분 바사박물관(Vasamuseet)

 

18:05분 실자라인 탑승

19:41분 저녘식사

익일 040분 취침

 

 

유르고덴성의 바사 박물관(Vasa Museum)

  바사박물관(Vasamuseet) 스톡홀름의 유르고덴 섬에 있는 바사박물관은 바사(VASA)호라는 배를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입장권을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실내에 거대한 배가 눈에 나타난다. 바로 바사호다.

바사(VASA)호는 바사 왕가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명령으로 네덜란드 출신 조선사 헨릭하버트슨의 감독에 의해 2년 가까이 걸려 건조 되었으며 왕조의 이름을 따 바사호(VASA)라 명명 한 것이라고 한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는 스웨덴의 국왕(1611~1632)으로 구스타브 1세의 손자이다.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북방의 사자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린 왕이다. 바사호는 뱃머리에서 선미까지의 길이는 69m이며, 최대 폭은 11,7m. 1,300톤에, 10개의 돛이 달린 3개의 돛대를 가지고 있으며, 탑승가능인원은 450(300명의 군인)으로 자작나무로 배를 만들었다고 하며, 배의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120톤 가까이의 돌을 맨 아래층에 가득 채워 선박의 무게 중심을 유지하려 했다고 한다.

 

  1628810일 스톡홀름 항에서 다른 여러 함대와 함께 첫 출항을 했는데 겨우 1300m 정도 항해하다가 수심 330m의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한 비운의 전함이다. 그 후 300여년이나 내해에 가라앉아 있던 바사호는 1956년 해양 고고학자 안더스 프란젠에 의해 발견이 되고 침몰 된지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다.

 

  바사호 인양 당시 14,000여개 이상의 목재조각 장식품들이 함께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특수 보존처리를 하여 원래의 위치에다 짜 맞추었다고 한다. 이 배는 전함임과 동시에 바다에 떠있는 궁전이기도 하기에 정밀하고 예술적인 의미를 가진 많은 조각품을 장식했다.

배에 장식된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자상, 영웅의 상, 황제의 얼굴, 해양 동물상, 천사상 등이 정교하게 목재로 조각되어 있다.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 분주해 막강한 해군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함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스웨덴 왕가의 자존심과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만든 목재전함이 왜 겨우 1300m 밖에 항해 하지 못하고 침몰했는지에 대해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다만 몇 가지 가설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출항당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많은 선원들이 한쪽으로 모여 배가 기우러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애초의 계획보다 더 많은 수의 포를 싣고자 했던 것이 침몰의 원인으로 상부 하중이 너무 커져 균형을 잡지 못하고 돌풍에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사호는 전함임에도 불구하고 배 전체가 180개에 이르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특히 배 꼬리 부분은 모두 금색으로 덮여 있어 매우 화려하다. 바사호의 인양과 함께 목조품과 조각상, 선원들의 유골, 유품이 함께 발견되어 17세기 사회상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바사박물관에는 바사호와 함께 1/10로 줄인 모형선을 비롯해 배안의 모습 등을 재현한 세트장들이 함께 전시되고 있으며침몰하는 모습도 미니츄어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바사호 침몰 당시의 세계사를 비디오 화면으로 소개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인조대왕 시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 바사박물관으로 이동중에도 카메라 셔터는 계속 작동 한다.

 

▼ 스톡홀름은 물의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바다 같은 호수와 다리들이 계속 등장하며 도시미관을 서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 17:06분 바사박물관 앞에 도착.

 

 

 

 

 

▼ 박물관 내부의 조명이 매우 어둡고 많은 관람객들로 일행들과 조금만 떨어져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전시된 바사호의 손상을 막기 위해 어두운 조명을 선택한 것인지....??

 

 

 

 

 

 

 

 

 

 

 

 

 

 

 

 

 

 

 

 

 

 

 

 

 

 

 

 

▼ 바사호 인양당시 사용하였다는 도구 전시장과 인양당시의 사진 전시물.

 

 

 

 

▼ 박물관 내부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층에서 바라본 바사호 모습!!

 

 

 

 

 

 

 

 

 

 

 

 

 

 

 

▼ 바사호 침몰당시 세계사를 소개하는 곳에서 조선의 인조대왕시기를 소개하고 있는 모니터!!

 

 

 

 

 

▼ 박물관 외부 잔듸밭 풍경!!

 

▼ 북방 민족 박물관

약 50분간의 바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면 바사박물관 맞은편에 궁전같은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다.

스웨덴의 북방 민족 박물관으로 1907년에 개장되었으며 스웨덴의 문화와 풍속을 보여주는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라는데 우리는

그곳 내부관람은 하지 못하고 주차장만 이용할 뿐이다.

이제 여행전부터 기대하였던 실자라인을 타러 가야 한다.

 

 

   1628810일 일요일 오후, 스웨덴 왕국의 스톡홀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인파가 부둣가에 모였다. 이날은 북방의 사자왕이라고 불렸던 호전적인 왕 구스타브 2세가 특별한 애착을 갖고 만든 최강의 전함, ‘바사호가 처음 바다로 나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배에는 선원 100여명과 남편이나 아버지로부터 승선 기회를 얻은 가족들이 배에 올라 부두 쪽으로 으스대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족들은 스톡홀름 앞바다의 요새까지만 항해를 만끽하고 내릴 예정이었다. 악대의 웅장한 행진곡 연주와 사람들의 함성으로 축제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인양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사호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비극을 맞았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첫 돌풍은 무사히 넘어갔다. 배가 좌현으로 기우뚱해서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했지만 결국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다음 작은 돌풍이 때렸을 때 대참사가 벌어졌다. 대포와 물자를 잔뜩 실은 거함 바사호는 다시 기울었고 축포를 쏘기 위해 열어둔 포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거워진 배는 더 기울었고 바닷물이 배 안에 차올랐다. 옆으로 기울어 가라앉기 시작한 배 안에서 선장은 하선을 명했고,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밑바닥 쪽에 있던 선원과 그 가족 30명은 결국 나오는 길을 못 찾고 배와 함께 수장됐다. 당시 스웨덴과 전쟁 중인 폴란드를 압박하러 발트해를 가로지를 예정이었던 바사호는 겨우 1300m가량 나아가고 꿈을 거둬야 했다.


이후 388년의 시간을 지나 지난달 13일 스톡홀름에서 바사호를 만났다. 거함은 변치 않는 위용으로 박물관에 들어선 이를 압도했다. 바닥에서 돛대 꼭대기까지 높이 52.5m, 함체의 높이(선미 기준) 19.3m5층 건물만한 나무배가 영화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선체의 길이는 47.5m, 뱃머리 대(바우스프릿)까지 포함한 총길이는 69m에 달했다. 보우스프릿에는 거친 파도를 넘어보지 못한 왕의 상징물, 사자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계의 바다를 향하지 못한 바사호가 400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인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있는 바탕에는 수많은 탐험가, 과학자, 고고학자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지난해 세계 최대 여행정보사이트인 트립어드바이저선정 세계 10대 박물관에 꼽힌 바사박물관에서 수중고고학 연구와 콘텐츠의 가치를 살폈다.


폴란드와 전쟁터에서 바사호의 합류를 손꼽아 기다리던 구스타브 2세는 어처구니없는 참사 소식에 대로하고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배에 남았다. 가까스로 탈출한 선장 쇠프링 한손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모두 철창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아무도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바사호는 64문의 대포와 300명의 전투원을 태울 정도로 당시 최강 화력으로 설계됐는데, 덕분에 물 밖의 선체가 너무 커졌고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복원력을 잃기 쉬운 상태였던 것이다. 설계자는 수많은 함선을 건조한 조선 명장 헨릭 히베르트손이었는데, 바사호가 완성되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출항에 앞서 위험을 알리는 징후는 여럿 있었지만 모두 무시되었다. 결정적 이유는 왕 자신이었다. 그야말로 가장 간절하게 이런 강력한 함선을 원했기 때문에 아래에서 올라온 경고는 중간에서 모두 없던 일이 된 것이다.

  세월 따라 전설처럼 되어버린 바사호를 현실로 일깨우고 사람들을 규합해 건져 올리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는 아마추어 고고학자 안데르스 프란센이었다. 1950년대 초부터 바사호에 주목한 그는 철저한 문헌 조사로 가라앉은 장소의 후보를 압축하고 무거운 추를 내려 바다 밑에 목재가 있는지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홀로 조사에 나섰다. 1956년 그는 드디어 바사호로 추정되는 검은 오크 목재를 발견한다. 그는 해군과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이는 위원회 설치와 인양 시도로 이어졌다. 바사호가 맞았다. 인양은 바사호 밑에 6개의 터널을 뚫고 쇠줄을 연결해서 들어 올리는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모두 1300명의 다이버가 2년에 걸쳐 이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다. 1961424, 바사호는 333년 만에 어두운 바닷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