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12성문(北漢山城 12城門)
- 산행지 : 북한산 12성문 종주
- 위 치 : 서울시 종로, 은평, 성북, 강북, 도봉구 및 경기도 고양시 일대
- 산행일 : 2011. 8.6
- 참석자 : 성봉현, 김창주
- 산행코스 : 진행방향으로 3구간으로 구분 함
1. 원효봉능선 구간 : 시구문(사암문) - 북문
2. 산성주능선 구간 : 위문(백운봉 암문) - 용암문 - 대동문 - 보국문(동암문) - 대성문 - 대남문
3. 의상능선 구간 : 청수동암문 - 부왕동암문 - 가사당암문 - 대서문
- 산행거리 : 도상 14.17km, 실제거리 약 17km
- 산행시간 : 9시간 51분 (시작 : 09시 44분, 종료 : 19시 35분)
알바 40분, 낮잠 : 40분 등 휴식시간 및 어프로치, 탈출시간 포함
- 날 씨 : 약간 흐리고 소나기(태풍 무이파 북상중)
- 주요구간별 소요시간
09시 38분 : 북한산성 입구
09시 46분 :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 길 구간 음식점 “미소”에서 산행준비
09시 48분 : 효자농원 입구
10시 01분 : 시구문 1
10시 23분 : 원효암
10시 39분 : 원효봉 전위봉
10시 49분 : 원효봉 (막걸리등으로 휴식 20여분)
11시 21분 : 북문
11시 45분 : 보리사(알바 시작)
11시 47분 : 산성입구 삼거리 갈림길
12시 02분 : 위문 입구 삼거리 갈림길(알바 끝)
12시 42분 : 약수암
13시 05분 : 위문
13시 28분 ~ 14:05분 중식(약 40분)
14시 22분 : 용암문
14시 53분 : 대동문
14시 5분 ~ 15시 38분 : 막걸리 및 낮잠(약 40분)
15시 48분 : 보국문(동암문)
16시 02분 : 용출봉
16시 07분 : 대성문
16시 23분 : 대남문 (대성문 지난 후부터 약 30여 분간 내린 소나기로 대남문에서 비를 피함)
16시 34분 : 문수봉 (문수봉 하산길 부터 우측 무릎 통증 시작됨)
16시 43분 : 청수동암문
17시 31분 : 부왕동암문
18시 23분 : 가사당암문
18시 30분 : 국녕사(알탕 20여분)
19시 22분 : 대서문
19시 37분 북한산성 입구 매표소
북한산성(北漢山城)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북한산성의 소재지는 서울시 종로, 은평, 성북, 강북, 도봉구 일원 5개구 및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산 1-1 일대이며
○ 1968년 12월 5일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 산성 규모는 543,795㎡(164,786평)의 석축으로 성의 둘레는 약 12Km이며, 성안의 면적은 약 200여만 평이다.
○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서 백제 개로왕(蓋鹵王) 5년(132)에 토성으로 축성(築城)하였으며 이때 백제의 주군력(主軍力)이 산성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고, 그 뒤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벌군의 중심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560-580년경 이곳 비봉(碑峰)에 진흥왕(眞興王)순수비-국보3호를 세우는 등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의 중심 요새지로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 신라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眞平王) 25년(603)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만명의 군사로 물리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冬陀川)이 성안의 주민 2,800명과 함께 필사의 결전으로 물리치기도 하였다.
○ 그러나 이때의 북한산성은 오늘날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북한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한산성(漢山城) 즉, 한산 지역의 북쪽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한편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顯宗)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고, 고종(高宗) 19년(1232)에는 삼각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으며, 우왕(禑王) 13년(1387)에는 삼각산에 중흥산성(重興山城)을 쌓기도 하였다.
○ 그러나 현재의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년)에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築城論)이 대두하여, 1711년 4월(숙종 37년)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6개월만인 그해 10월에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 대남문(大南門) · 북문 ․ 암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축성 이듬해인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성내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었으며 12개의 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성곽의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성체(城體)는 완전히 보존되었다.
○ 숙종 37년 4월에 착수한 이 공사는 어영청(御營廳) · 금위영(禁衛營) · 훈련도감(訓鍊都監)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의 각 군문에는 책임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는 내책응(內策應) · 외책응(外策應) · 독책장(督策將)을 두었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는 물론 서울의 주민들과 승려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서울의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 · 중 · 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다.
○ 이때 이룩된 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약 6개월에 걸쳐서 완성을 보게 된 북한산성의 성기(城基)는 대서문 · 의상봉 · 증취봉 · 나한봉 ․ 보현봉 · 만경대 · 백운대 · 원효봉 등 암릉과 능선을 연결하는 선으로 길이는 모두 7, 620보, 즉 21리 60보가 된다.
그 중에서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는 어영청에서 보현봉에서 용암 남변까지의 2,821보는 금위영에서, 용암(龍岩)에서 수문(水門) 북변까지의 2,292보는 훈련도감이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 성문은 모두 13개로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 사이에 대서문(大西門, 높이 11척, 폭 13척), 가사당암문(높이 7척, 폭 7척), 부왕동암문(높이 9척, 폭 8척), 청수동암문(높이 7척, 폭 7척), 대남문(大南門, 높이 11척, 폭 11척)이 있고,
보현봉에서 용암 남변까지 사이에 대성문(大成門, 높이 13척, 폭 14척), 보국문(輔國門,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 대동문(大東門, 높이 9척, 폭 10척), 용암봉암문(높이 6척 5푼, 폭 7척 5푼)이 있으며,
용암 북변에서 수문 북변까지 사이에는 백운봉암문(높이 6척 3촌), 북문(높이 11척, 폭 10척), 서암문(西暗門, 높이 7척, 폭 7척), 수문(높이 16척, 폭 50척)이 있었다.
○ 또한 상원봉(上元峰)아래에는 전란 및 유사시 임금이 임시로 거처할 수 있는 별궁으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을 지었다. 또한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 있었으며. 이 밖에도 12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도 있었다.
축성이 끝난 후 숙종 38년(1712)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로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고, 여기에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行宮)의 수호ㆍ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ㆍ동문ㆍ 서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관리토록 하였다.
그러나 산성 및 유적들은 1915년 8월의 집중호우와 일제 강점기시에 일본군의 주둔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성벽(성체)은 아직도 남아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은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 · 우물터 · 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그동안 방치되어온 북한산성의 복원사업을 1991년부터 시작하여 1999년까지 대남문 · 대성문 · 대동문 · 동장대와 보국문(동암문)과 5개의 암문, 무너진 성곽 등을 보수하여 북한산성의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북한산성 안의 성문은 모두 14개, 원효능선상에 시구문(서암문), 북문 등 2개의 성문이 있고 주능선상에는 위문(백운봉암문), 용암문(용암봉암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등 6개의 성문이 있으며 의상능선 상에는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산 행 지 도>
<산 행 내 용 및 사 진>
- 봉현과 안부 전화를 하던중 갑자기 산행을 하게된 예정되지 않은 산행이었다.
장마가 끝난 후에도 계속 되는 국지성 호우에 이어 태풍 무이파가 북상한다는 일기예보 속에 진행된 산행으로 대서문 인근에서 소나기를 맞았으며,
근래들어 제대로 된 산행을 하지 못했던 댓가를 하산길에서 톡톡히 치루었다.
- 당초 산행 예상 시간을 6 ~ 7 시간 정도로 예상하였으나 북무에서 위문을 향하던중 알바를 하였고 무덥고 습한 날씨로 땀을 많이 흘려 낮잠을 자고,
소나기를 피하느라 지체, 우측 무릎 통증이 재발하여 마지막 하산길에서는 거북이 산행이 되어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
- 높은 온도와 습한 기운으로 많은 땀을 흘리었던바 산행 다음날이 되어서도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그런 몸상태가 되어 버렸다.
* 어프로치 : 7시 40분 경 집에서 출발하여 버스로 광나루로 이동하여 전철로 갈아 타고 홍제역에서 봉현과 조우하였다.
홍제역에서 704번 버스를 이용하여 9시 35분에 북한산성 입구에서 하차하여 시구문 입구인 효자원에서 부터 산행을 시작하였다.
1. 원효봉능선 구간 : 시구문(사암문) - 북문
▼ 버스에서 하차하여 잡은 원효봉 모습
▼ 들머리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안내글을 따라 가면 쉽다
▼ 이 음식점 파라솔에서 본격적인 산행 준비를 했다.
▼ 시계 방향으로 잡은 등로코스중 첫 번째 목표물인 시구문
사진에 보이는 산객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12성문 종주를 할 수 있었다.
▼ 시구문에서 원효봉 까지는 이런 돌계단 된비알 길을 올라 서야 한다.
▼ 염초봉과 백운대
▼ 도봉산과 만장봉
▼ 보수 흔적이 뚜렷한 성벽길을 따라 서 진행
▼ 처음으로 밟아 보는 원효봉
▼ 이리해서 삼각산 이련가??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한 눈에....
▼ 칭구야!!
우리도 쉬어 가자!!
원효봉 오름길에 흘린 땀을 막걸리로 보충하고...
▼ 원효봉과 지척거리인 북문을 접수하다.
▼ 이 계곡을 지난 삼거리에서 8시 방향으로 크게 꺽여 갔어야 하는데 막걸리 빨로 냅다 직진을 하였으니....
▼ 알바길에 나타난 암자!!
이때 까지도 알바인지 몰랐다...
▼ 산성 입구 삼거리 갈림길
여기서 기분이 쒜에~~~
그냥 집으로 갈수는 없잔아??
다시 빽.....
▼ 헉 헉...
잃어 버린 길을 다시 찾은 멋젂은 미소!!
▼ 여기서 부터 위문을 향한 돌계단 오름길......
어이 칭구야 이런 산행은 한여름에 하지 말자 응??
엄청나게 많은 땀을 배출시키었다.
▼ 12성문 종주시 가장 힘들 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가슴을 터질 듯 부풀리게 하며 많은 땀을 배출 시키는 그런 오름길이다.
▼ 추억의 장소 위문!!
중학교 3학년때 일반 양말 달랑 하나에 런닝화 차림으로 한겨울 눈산행을 했던 기억은 지울수가 없다.
아니 지워지지 않는다. 산행후 젖어 버린 양말에서 짜낸 물이 족히 한대야는 되었을 듯...
그래도 그대는 추운지도 발시려웠는지도 몰랐었는데...
2. 산성주능선 구간 : 위문(백운봉 암문) - 용암문 - 대동문 - 보국문(동암문) - 대성문 - 대남문
▼ 그나마 훤히 보이는 노적봉이 더위를 식혀 준다.
위문 옆의 만경대에서 용암문까지는 위험한 암벽구간으로 관리공단 직원이 통행불가를 외치며 지키고 있다.
일반 등산로는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서서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는데 암릉구간에는 철주를 설치 해 놓아 안전을 도모해 놓았다.
▼ 그 왼쪽으로는 하산방향인 의상능선이 한 눈에 보이고 국녕사 불상이 어서 오라는듯 하다.
▼ 수락산 기차 바위를 연상시키는 홈통바위??
▼ 노적봉 안부 인근의 한적한 숲속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곳부터 용암문 인근까지는 평탄한 길로 식곤증이 마구 마구 밀려 온다.
아~~ 졸려!!
▼ 능선에서는 이런 이정표만 따라가면 등로 걱정은 끝!!
▼ 용암문
암문은 적들 몰래 드나들길 위한 비밀 통로였기에 암문이라 불리웠단다.
▼ 북한산 대피소!!
이곳에서 삼겹살을 굽고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었던 일은 호량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이제는 담배도 못피우게 하니...
▼ 성벽을 이루는 바위색상으로 복원된 성벽임을 알 수 있다.
대피소를 지난 산길 또한 평탄한 길이 쭈욱 이어지며 이처럼 복원된 산성을 따라 걷게 되는데 평탄한 길에서의 편안함으로 밀려 오는 식곤증이 더해지어
동장대를 지나 쳤다.
▼ 산 아래로 보이는 속세의 모습은 성북구 방향으로 바뀌고........
▼ 넓은 공터 한 켠에 자리 잡은 대동문에 들어 섯다.
클 "대"가 붙어 있는 문은 망루가 있는 규모가 큰 문이다.
▼ 졸려서 않되겠다.
남아 있는 막걸리를 모두 해결하고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를 자장가 삼아 오수를 즐기었다.
▼ 동장대를 아무생각 없이 지나쳐 버린 것이 뒤늦게 떠 올리고 제법 가까이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보국문에 들어 서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산을 하면 정릉 방향이고 여기서 대성문으로 가는 길이 12성문 종주시 세 번째 고비이며 산성주능선상에서 가장 힘든 길인데
대성문의 고도가 높아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산성주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안내판이 있는 조망터!!
이곳에서는 웅장한 삼각봉우리와 유연하게 이어지는 주능선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 보이던 도봉 주능선은 제법 거리감 있게 멀리 보인다.
▼ 앞으로 가야 할 성벽들.
이 부근부터는 이 성벽들을 따라 가도 되고 일반 등산로를 이용해도 되는데 더운 여름에는 햇살을 피해 숲속 길인 일반 등로를 따르는게 좋을듯 싶다.
▼ 방귀가 잦으면 모가 나온다 했던가....??
원효봉 인근의 하늘색이 시커 멓게 변하고 속세에 내리는 빗줄기들 모습이 보이더니 드디어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는 피해 가라는 옛말에 따라 대성문에서 비를 피해 잠시 발걸음을 추스리었다.
일반적으로 4대문을 이야기할 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 하며 북문을 제외한 나머지 문에 대해서는 큰 大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4문을 제외하고 특이하게 大자를 붙인 대성문. 4대문보다도 오히려 규모가 큰 사연은 임금님이 다니신 주요 성문이었단다.
▼ 들어 가지 말라고 하는 대성문 누각에서 잡은 대성문
대성문에서 대남문으로는 숲속길로 가는 편안한 길과 성벽길이 있는데 두길을 교대로 밟아 가며 진행 했다.
성벽길은 계속 오르막으로 역시 힘든 구간이고 일반 등로는 숲속 길이며 성곽이 있는 지점중 위문 다음으로 높은 고도란다.
뿌연색으로 보이는 것이 속세에 내리는 소나기 빗줄기이다.
▼ 가늘어진 빗줄기 속으로 진행하자 대남문이 반기어 준다.
▼ 대성문은 구기계곡, 산성주능선, 비봉능선, 의상봉능선이 갈리는 교통의 분기점으로 대동문과 더불어 북한산 성문중 등산객들이 가장 많은 곳이다 .
산성을 따라 조금 오르면 문수봉에 닿으며 비봉능선이 문수봉에서 실제 갈라지지만 문수봉의 암벽구간이 위험하여 일반 등산로는 문수봉을 우회하여 청수동암문에서 갈라진다.
▼ 청수동암문으로 바로 가는 길은 비교적 아주 편안한 길로 그 중간에 문수봉에서 바라보는 능선의 조망이 일품이었다
▼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그리고 피아노 바위... 한 가운데 허연넘이 노적봉
▼ 낮게 깔린 흰구름과 멀리 보이는 한강, 그리고 김포
3. 의상능선 구간 : 청수동암문 - 부왕동암문 - 가사당암문 - 대서문
▼ 청수 동암문을 만나며 의상능선안으로 몸을 옮긴다.
▼ 청수동암문을 만나니 이제 오늘 산행의 클라이 막스로 접어든다.
▼ 청수동암문에서 약5분만 오르면 남장대능선이 갈라지는 716m봉을 지나며 나월봉 우회길로 부왕동암문을 향해 전진한다..
▼ 허물어져 버린 성벽들이 간신히 흔적만을 보여 주더니 이 부근에서 이것이 성벽이었음을 주장하는 듯 하고 등로는 완만한 내림길이다.
▼ 부왕 동암문.
정식문보다 암문이 더 많은 북한산성 성문!!
적들에게 포위된 것을 가정 한다면 암문의 필요성을 말로 표현하면 모허나??
▼ 부왕동암문은 일명 소남문이다. .
▼ 마지막 봉우리인 용출봉 안테나가 우리를 기다리는 듯 서 있으니 이제 오늘 코스중 마지막 두 봉우리인 용형봉, 영출봉만을 남겨 놓았다
▼ 용혈봉에서의 조망
과연 노적가리를 연상시키는 노적봉이다!!
▼ 12성문 종주시 마지막 봉우리인 용출봉 오름길 구간의 바위 능선길 모습!!
▼ 용출봉은 하산로인 국녕사를 발아래에 두었는데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재발하여 내림길이 괴로워 진다.
소나기 내릴때 우이동으로 하산할까??
그 권유를 들을걸 그랬나??
헌데 언제 또 오나??
▼ 용출봉 하산로의 철주 모습!!
이곳 철주로 번개치는 날 안전사고가 발생하여 용출봉에 피뢰침을 설치 했단다.
▼ 12개 성문중 11번째인 가사동암문!!
마지막 대서문은 도로에 있으니 어찌보면 이 가사동암문이 마지막 문일지도....
▼ 국녕사 전경
▼ 범용사란 절에 내려 섬으로서 산행은 사실상의 산행은 종료되고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는 중 도로상의 대서문만 만나면
12성문 종주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북한산(北漢山) 836.5m
북한산은 백운대(836m), 인수봉(810m), 국망봉(만경대 800m)등 세 봉우리가 삼각의 모양으로 서 있다 하여 삼각산이라 불러왔다.
화산 또는 부아악으로도 불리어 왔는데 산이 높고 깍아 지른 듯 험준하여 등반하기 어려운 반면 주봉인 백운대정상에 오르면 사방 1백리 반경이 모두 발아래 내려다 보여 그 경관은 실로 아름답다.
백운대 정상에 서면 맞은편의 깍아지른 듯 서 있는 인수봉에 아슬아슬 달라붙은 암벽등반 인들이 눈낄을 끈다. 국망봉, 노적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모두 발밑에 있음은 물론 도봉, 북악, 남산, 남한산, 관악산 등 멀고 가까운 산들이 모두눈앞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바다건너 강화도, 영종도 등 서해상의 섬들도 볼 수 있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비봉을 중심으로 승가사와 진관사, 문수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북한산 기슭에는 또한 세검정과 성북동, 정릉, 우이동 등 여러 계곡들이 있으며 198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여기까지 도착하면 진정한 산행은 끝이 난다!!
▼ 알바 지점 확인!!
위문을 향하던중 이곳까지 내려 왔다 다시 되돌아간 삼거리길을 기념(??) 하며...
▼ 국녕사를 지난 후미진 계곡에서 몰래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는데 부슬비가 다시 나린다.
우쒸!!
마지막 남은 대로상의 대서문을 인증샷 처리하고 귀갓길에 신설동 개장국으로 뒷풀이를 하였다.
▼ 마지막 관문인 대서문!!
평상시 이곳을 지나칠때는 아무런 의미 없이 다녔었건만 오늘은 이 문을 바라 보는 마음 자세가 뿌듯하기만 하니 여기서 북한산성의 성문에 관하여 짚고 넘어 간다.
북한산성의 성문
북한산성에는 모두 14개의 성문이 있으며, 시계 방향의 순서대로 보면 대서문 좌측의 원효봉능선상에 시구문(서암문), 북문, 주능선상에 위문(백운동암문), 용암문(용암봉암문), 대동문, 보국문(동암문), 대성문, 대남문이 위치하고 의상봉능선상에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이 있다. 계곡에는 중성문과 수문이 있으며 이중 수문은 없어진 상태이나 그 형태는 아직도 남아있다. 백운동계곡의 2개 문을 합하여 북한산성의 문은 모두 14개가 되며, 성벽에 있는 성문은 12개이다.
대서문· 북문· 대동문· 대남문· 대성문· 중성문 등 6개는 홍예문(문의 위쪽이 반원 형태)과 문루(門樓)가 설치된 규모가 큰 성문으로 4대문은 대서문, 북문, 대동문, 대남문이며. 대성문은 4대문이 아니지만 큰 大(대)가 붙은 이유는 국가 유사시 경복궁에서 북한산성으로 대피하는 길이라 할 수 있는 보토현(지금의 북악터널 자리)과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왕이 출입하기 위한 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전하여 진다.
암문은 시구문(서암문)·위문(백운봉암문)·용암문(용암봉암문)·보국문(동암문)·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등 모두 7개이며 암문(暗門)이란 문루를 세우지 않고 눈에 띄지 않도록 출입하기 위한 작은 비밀의 문을 의미하며, 전체 14개의 성문 중 북문과 수문을 제외하고 전부 복원이 되었고, 북문은 문루가 없어지고 문의 형태만이 남아 있으며, 수문은 성벽 형태만 남아 있다.
▼ 북한산성 관리소 전경.....
이제 하산주로 뒷풀이만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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