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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유 럽 6 국

제 6 일(8월 9일, 토요일) 2. 노르웨이 오슬로 ~ 스웨덴 칼스다드로 이동

 

5 (88, 금요일) : 하루종일 스웨덴의 칼스다드로 이동

오슬로를 경유하여 칼스타드로 이동

호텔식, 한식, 중한식

 

<실 제 일 정 표>

6 (89, 토요일) 2. 노르웨이 오슬로 ~ 스웨덴 칼스다드

 

06:30분 기상

07:44분 아침식사

07:58분 야일로 호텔출발

12:30분 점심식사(스키장 구내식당)

13:27분 오슬로 시청사 도착(카를요한 거리 관광)

14:52분 오슬로 시청사 출발

 

16:12분 노르웨이 vs 스웨덴 국경통과

17:52분 칼스타드 석식

19:06분 칼스타드 호텔도착

    

  스웨덴의 정식 명칭은 스웨덴왕국(Kingdom of Sweden)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은 449,964로 한반도의 두배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동서의 길이는 499, 남북의 길이는 1,574로 가늘고 긴 국토를 가지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경계로 노르웨이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북동부로는 핀란드와 접하고 있다.

 

  스웨덴의 국토는 대부분이 바다와 접해 있으며, 동부는 발트해와 보트니아만, 서남부는 스카레가크와 카테카트 해협, 남부는 외뢰순 해협이 위치해 있으면서 덴마크, 독일과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유럽에서 네번째로 큰 국토를 지니고 있으며 삼림지대가 전국토의 50%, 경작지가 10%, 호수와 하천이 9%, 기타 31% 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호수도 96,000여개에 달한다. 면적은 45로 한반도의 2.4배에 해당하며, 북유럽 노르딕국가 중 945만명(2011, 세계은행)으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전체 인구의 95%가 스웨덴인이며, 이외에 우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핀족 약 2만명이 북부 국경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입양아가 4만명 정도 살고 있는데, 한국인 입양아도 12,0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스웨덴인은 게르만족의 한 갈래로 다른 인종과의 혼혈 정도가 적으며, 북부 지방의 소수 토착민인 랩족을 제외하면 북게르만어파의 일종인 스웨덴어를 사용한다. 스웨덴어()는 인도유럽어 중 게르만어에 속하며, 그중에서도 스칸디나비아어에 속한다. 노르웨이어 ·덴마크어와 가까운 관계에 있어, 가령 스웨덴인이 스웨덴어로 말하고 노르웨이인이 노르웨이어로 대화해도 의사가 완전히 통한다. 200년경까지는 동일한 언어였던 것이 그 후 수백 년 동안 분화하여 현재의 각국어가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연중 반이 넘는 10월부터 4월 까지가 겨울철로 춥고 눈이 많이 오며, 밤이 길어 오후 2시만 되면 날이 어두워지는 극야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겨울이 길고 춥고 어둡다 보니 우울증에 많이 걸리고 술을 많이 마시게 되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18세 이상의 자녀는 독립하여 분가하기 때문에 두 부부만이 살게 되고, 부부간에 정이 없으면 나이 먹어서도 이혼을 많이 하게 된다고 한단다. 18세 이상의 분가한 자녀들도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동거를 많이 하며 그래야 부모도 안심할 수 있고 간섭을 안 한다고 한다.

 

  화폐단위는 스웨덴 크로나(Sweden Krona/SEK)이고, 1SEK는 우리돈으로 170원정도이다.스웨덴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국기는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그려져 있다.

 

   현재는 북유럽 국가들 간에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1인당 국민소득이 4$의 부자 나라로 담세율이 평균 40%이며 고소득자의 경우 90%까지 세금을 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담세율이 높은 반면 의료보험제도가 발달하여 전 국민이 병원이 무료이며, 대학까지 무료이고 어린아이들도 1명의 경우 월14만원 2명의 경우 월 30만원의 용돈이 나오는 등 자녀가 많을수록 많이 지원하는 등 사회복지제도가 발달했다고 한다.

 

  스웨덴이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6· 25 한국전쟁 때로 부산항에 의료선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오히려 한국에서 간호사들이 많이 오는데 LG TV와 냉장고가 인기 있다고 한다. 이 나라는 자동차 산업과 기계공업이 발달했는데 특히 Volvo자동차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기계공업의 발달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무기를 팔아 부국이 되었다고 한다.

 

  스웨덴의 역사

  스웨덴은 빙하기가 끝나가던 기원전 11000년경부터 인류가 유입되어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스웨덴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 등장한 것은 9세기경으로 바이킹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처럼 해상을 통한 활발한 대외교류로 번성했던 스웨덴은 바이킹들이 활동하던 800~1000년경까지는 다른 북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기 보다는 여러 왕가가 지역을 지배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스톡홀름의 창시자 비르예르 얄(Birger Jarl, 재위 1250~1266) 왕이 법률을 정비하면서 중앙집권 형태의 왕국을 탄생시켰다.

 

   그런 스웨덴에는 1340~50년대에 유행한 흑사병의 영향으로 국가 전체가 크게 흔들리게 되고 이후 국가 내부의 극심한 혼란까지 더해지자 결국 스웨덴 귀족들은 자신들의 국왕을 폐위시킨 후 1397년에 덴마크 '마르그레테' 여왕의 북유럽국가연합인 '칼마르 동맹'에 자발적으로 합류하여 노르웨이, 덴마크 등과 함께 마르그레테 여왕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칼마르 동맹은 성장하는 독일이 한자동맹을 앞세워 발트해를 장악하려던 것에 맞서고자 하는 초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는 듯 보였으나, 마르그레테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혼란에 빠졌고 덴마크 왕의 계속된 통치에 각국의 독립 의지까지 더해져 결국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1523년까지 126년간 이어진 이 통합왕권에 대한 스웨덴의 반항은 계속되었으며, 1434년에 이르러 광산업자 엥엘브렉트(Engelbrekt) 농민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귀족과 시민도 가담한 국민운동으로 확대되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1520년의 스톡홀름 대학살을 계기로 이듬해인 1521년에 스웨덴의 젊은 귀족인 구스타브 바사가 일어나 농민군을 거느렸으며, 한자동맹의 원조를 얻어 덴마크 왕권을 추방하였다. 그는 1523년에 의회의 추대를 받아 국왕 구스타브 1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해 칼마르 동맹은 무너지고 스웨덴은 독립하게 되었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구스타브 1세는 이를 스웨덴에 도입하고 교회개혁을 촉진하였으며, 1529년에 의회는 루터파() 신교를 채택하였다.

 

   1560년에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어 1611년에 왕위에 오른 '구스타프 아돌프 2'(재위 1611~1632)는 구스타프 바사왕의 손자로 '북방의 사자'로 불렸는데, 광산개발등으로 경제를 성장시킴과 동시에, 대륙진출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1630년에는 독일로 진격하여 세계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 불리는 '30년 전쟁'에 참여하는 등 발트해를 내해로 만들고자 하는 지정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극적인 확장에 나섰고, 획기적인 전술로 승승장구하여 오늘날의 핀란드와 노르웨이의 상당수를 장악하는 성과를 거둬 스웨덴의 황금기를 연다. 그는 브라이트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카톨릭 연방을 패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1632년 뤼첸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스웨덴은 1648년 웨스트파리아 조약에 의하여 독일 북부의 광대한 영토를 얻게 되어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칼 구스타브 10(Karl X Gustav) 때는 덴마크를 패배시켜 현재의 남부 스웨덴 지방을 덴마크로부터 획득하였다. 이때가 스웨덴이 군사적으로 가장 용맹을 떨쳤던 시기이다. 그러나 강대국이 된 스웨덴도 1700~1721년의 북방 대 전쟁에서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젊은 칼 12(Karl XII)는 용감히 싸워 러시아군을 대파하고 덴마크와 폴란드를 항복시켰지만, 1709년 러시아의 '표트르 1'의 군대에게 폴타바(Poltava)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상당수 영토를 잃게 되고, 터키로 도주하여 1718년에 사망하였다.

 

   결국 핀란드를 제외한 발트 해 남부와 서부에 있는 많은 영토, 그리고 북부 독일의 영토를 상실하여 유럽의 강대국 대열에서 급속히 탈락하였으며 스웨덴의 대국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 했는데, 스웨덴의 국민은 칼 12세의 전제정치에 대한 불만이 그의 죽음과 함께 고조되어 국왕 프레데리크 1세는 즉위 조건으로 국민이 요구한 새 헌법을 1723년에 발포하였다. 이에 따라 왕권은 제한되고 의회는 강력한 존재가 되었으나, 입헌정치의 노선은 처음에 충분한 안정을 얻지 못하였으며, 정당간의 다툼으로 정치가 종종 무질서에 빠지고 외교정책은 혼란을 거듭하던 중, 오스트리아 계승전쟁과 7년 전쟁에 무의미하게 참전하고, 그 결과 많은 영토를 잃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전환하여 러시아와 싸워 핀란드를 잃었으며, 그 후에는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스 장군 베르나도테를 황태자로 맞아들였다. 1809년 그는 칼 요한이라 칭하여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반 나폴레옹의 태도를 취해 활약하였으며, 1814년에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어내고, 1818년 왕위에 올라 14라 칭하였다. 그가 현 스웨덴 왕조의 시조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스웨덴의 최대 과제는 노르웨이의 분리문제였다. 노르웨이는 국민감정이 덴마크에 가까워 스웨덴과 완전 분리하기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1905년에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스웨덴 국내에서는 무력저지론도 있었으나 결국은 분리를 승인하였다.이 무렵부터 스웨덴의 민주정치는 안정되어 책임내각제가 확립되었다.

 

 

 

< 여    행    사    진 >

 14: 50분 오슬로 시청사 출발

이제 오슬로와 이별을 한다.

수 많은 감흥을 주었던 노르웨이와도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 후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피요르드와 터널, 그리고 맑은 공기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으니 이번 여행중 들른 6개국중 최고였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이곳을 떠나자니 아쉬움이 배가 된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문화가 기다릴지 모르니 그것들에 대한 기다림을 않고 유럽역사의 한페이지를 작성했던 스웨덴으로 입성을 하는 것이다.

 

 

 

 

 

 

 

 

▼ 16;12분 스웨덴과의 국경에 도착한다.

그러나 국경이 국경이 아니다. 여권조사도 신분조사도 아무런 절차가 필요없다.

그냥 화장실을 다녀 온후 운전기사의 노동시간을 맞추어 주기 위해 한담을 하며 국경검문소에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 17:46분 석식

스웨덴의 국경을 통과하여 칼스타드에 입성하였다.

호텔과 떨어진 음식점에 들려 일식, 한식을 하는 식당에 도착하였는데 음식준비가 덜 되었으니 잠시 대기하란다

어제, 오늘 이틀간 국적없는 한식으로 경기르 하다시피 했던 마음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특식으로 나온 연어회와 일본식 도시락 형태로 나온 음식들이 제법 입맛에 맞았다.

최소한 음식이 이정도는 되야 하는 것 아닌지....

특히, 특식으로 제공된 연어회는 냉동되지 않은 자연산 그대로 나의 입맛을 달구어 놓았다.

국내에서야 냉동된 연어를 먹으며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맛본 연어회의 감촉은 오래 지속 되것 같다.

 

 

 

 

▼ 19:06분 호텔 도착

저녘식사까지 하고 도텔에 도착하였느데 시간이 아직 초저녘이다.

제법 많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짐정리를 차분히 할 수 있었다.

내일은 스톡홀름 시내를 관광하고  실자라인에 탑승하여 늦은 밤까지 일정이 이어짐으로 오늘 저녘에는 한가한 저녘을 보내며 앞으로 남은 일정을 위한 컨디션을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 기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