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 유 럽 6 국

제 3 일(8월 6일, 수요일) 오슬로1. 비겔란 조각공원

 

 

<노랑풍선의 일정표> 노르웨이 : 오슬로로 이동 관광 후 게일로로 이동

 

- 오슬로 관광 : 뭉크 미술관 내부관광, 시청사 내부 관람, 카를요한 거리, 비겔란 조각공원, 이케로스투스 요새 관광

선상식, 한식, 현지식

 

<실 제 일 정 표>

05:10분 기 상

05:37분 선내 관광 일출

07:57분 아침식사

09:55분 하 선

10:03분 버스 탑승

 

 

10:29분 비겔란 조각공원

11:20분 비겔란 조각공원 출발

 

 

    

11:45분 오슬로 시청사 도착

12:00분 시청사 출발

 

12:19분 음식점 핫팟한식으로 중식

12:54분 뭉크미술관으로 이동

13:10분 뭉크미술관 도착

13:58분 게일로로 이동 시작

 

19:52분 게일로 호텔 도착

19:57분 석식(호텔식)

23:03분 취침

 

 

<노르웨이 와 오슬로 위치도>

 

 

  웨이 [Norway] 공식명칭 : 노르웨이왕국(Kingdom of Norway)
   피오르드와 바이킹의 나라인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쪽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향해 길게 뻗어있고 해안선길이가 무려 2,000km나 되며,  유럽에서 5번째로 큰 국가로 16만 개 이상의 호수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산악국가다.

  북쪽으로 바렌츠 해, 서쪽으로 노르웨이 해 및 북해, 남쪽으로 스카게라크해협, 동쪽으로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연방 등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1.7배로 노르웨이인과 랩인을 포함한 여러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루터복음교를 헌법상 국교로 지정하였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공용어는 노르웨이어이며 화폐단위는 노르웨이 크로네(Norwegian krone/NKr)이며  우리돈으로 1크로네는 대략 200원 정도이다. (50크로네=1만원)

   전통적으로 어업 및 임업국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광업과 제조업이 크게 증가했다.

주로 서비스업, 석유와 천연가스생산업, 경공업, 중공업 등에 기반을 둔 경제가 발달했고, 단원제를 기초로한 입헌군주제다.

   국가원수는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군이 침공하여 점령당했고 포괄적인 사회복지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토(NATO)회원국으로 국민들은 1994년 유럽연합가입을 거부했다.

   노르웨이는 특이한 장례문화를 갖고 있는데 교회 옆 마당에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 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층층으로 매장을 하는데 만약 시아버지가 죽고 나중에 며느리가 죽으면 시아버지 위로 며느리를 층층으로 매장을 한단다. 이 나라는 자연보호를 최우선으로 다루어 집을 지을 때도 산 밑 또는 언덕에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마당도 없이 그대로 지으며 물건을 구매하더라도 소유의 개념이 아님으로 나중에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국가(사회)에 환원한다고 한다.

 

  오슬로 [Oslo] 옛 이름은 Christiania(1624~1877), Kristiania(1877~1925)

오슬로는 '신들의 정원'이라는 의미이며 ,노르웨이 남부해안에 있는 도시로 900여 년 전 북유럽을 주름잡던 바이킹들이 가장 사랑했던 도시다. 여름은 물론 해를 거의 보기 힘든 겨울에도 늘 젊고 패기 있는 분위기를 발산한다.

1048, 바이킹 왕 하랄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1299년 호콘 5세에 의하여 수도로 정해져 한자동맹의 항구로서 번영되었다.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8세기이후로 바이킹의 활동이 두드러져 바이킹의 수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면적의 4분의3이 삼림과 전원지대로 수영과 스키를 즐기려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매력적인 도시다. 오슬로의 오페라하우스는 빙하의 얼음이라하며 빙산모양이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도시로 자체가 하나의 주를 이루며 노르웨이 남동쪽에 있는 오슬로 피요르드의 끝부분에 있다. 원래는 아케르 강 동쪽에 있었다. 1050년경 하랄 하르드로데 왕이 세웠으며 1300년경 하콘 5세가 아케르스후스 요새를 세웠다. 1624년 화재로 파괴된 뒤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가 보다 서쪽의 아케르스후스 요새 성벽 아래에 신도시를 세워 크리스티아니아라고 불렀다 1925년에 이르러 오슬로란 본명으로 되돌아가 오늘에 이른다. 주위의 여러 자치체들을 흡수하게 됨으로써 19세기에 인구가 늘어나 그 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던 베르겐이라는 서쪽 해안 항구도시보다 커지게 되었다.

1925년 오슬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

1948년 주위의 도시인 아케르를 합병했으며 그 후 수십 년 만에 많은 위성 도시와 주거지대가 오슬로의 동부로 발전했다. 노르웨이의 무역·금융·산업·상업의 중심지로 오슬로 항구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분주한 항구이다.

 

주요산업은 소비재 생산, 조선, 전자공업, 그래픽 산업이다.

오슬로 서쪽에 있는 스쾨엔에는 노르웨이 무역 박람회 전시장이 있고, 북동쪽에 있는 외케른에서는 주요 모피경매가 열린다. 도로·철도·항공 편이 교차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슬로에는 노르웨이의 주요 문화기관들이 있다. 도시 중심부에는 국립극장, 노르웨이 극장, ()오슬로 극장, 노르웨이 오페라 극장이 있다. 오슬로대학교 근처에는 역사박물관(민속박물관 포함)과 국립미술관이 있는데 국립미술관에는 유명한 미술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시의 동쪽에 있는 퇴엔에는 식물원과 박물관들이 있다. 뷔그되이에 있는 노르웨이 민속박물관과 바이킹 선박 전시관, 프람후세트(유명한 극지대 탐험선이 전시되어 있음콘티키 박물관(토르 헤예르달의 태평양 탐험을 기념), 노르웨이 선박 박물관은 오슬로가 바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서쪽에 있는 프로그네르 공원은 근대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슬로대학교에는 여러 과학 연구소들이 부속되어 있으며 노르웨이는 대학 도서관으로 되어 있다. 오슬로에서 가장 유명한 강당은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가 장식한 오슬로대학교 강당인데 필하모닉 악단의 연주회도 이곳에서 열린다. 다른 국립 고등교육 중심기관들도 있다. 오슬로는 겨울 스포츠, 특히 크로스컨트리 스키에 아주 적합한 자연 조건을 갖춘 곳으로 해마다 개최되는 홀멘콜렌 대회에는 각국의 주요 스키 선수들이 모두 참가한다.

인구 521,886(2004 추계).

 

오슬로는 한겨울에는 영하 40까지 내려가고 한여름에는 영상 40까지 오르는 등 기온차가 평균 80이상이라고 한다. 기원전 2,000년경 개국하여 7세기경부터 게르만족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98%가 게르만족이며 쎄미족은 2%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노르웨이는 4인 가족 기준으로 차량 1.8대씩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63108m에 이르는 쌰쓰호텔이라고 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3(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이 공동투자하여 을지로에 위치한 국립의료원을 설립한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와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여    행    사    진 >

 

 노르웨이 이야기 : 

  오슬로 항에서 버스에 탑승하자 유학생 신분의 로칼 가이드가 인사를 하며 이곳현지 사정을 설명해 준다.

오늘 단 하루만 가이드를 하는 것인데 말의 논리가 정연해 보이고 상당히 똘똘해 보이는 여학생으로 보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여기도 지금이 휴가시즌이며 시즌이 되면 거의 대부분이 외국여행을 떠나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매우 불편해 진단다. 심지어 사람이 죽어도 장례를 못치루는 형편이란다.

 

  한편,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산맥이 있어 두 국가로 분리된 듯 보인다. 즉 이 반도땅을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산맥을 경계로 한쪽씩을 차지 하고 있는 형국이다. 내가 백두대간 산행을 하며 깨우친  이치가 산맥은 사람, 문화, 풍물을 달리 만들어 놓는 것이다.

저 옛날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정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아마도 교통이 불편하니 통치하기애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수고로움 만큼 남는게 없었으니 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버려진 이 땅에 축복이 내렸다. 무진장한 천연가스와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이 나라는 국민소득 10만불을 상회하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오슬로 시내교통은 전차로 운행되는 철도중심이며 저상굴절 버스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준단다.

환경을 위한 전기차 보급률이 높고 승용차는 소형위주란다.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신용카드를 사용하며 500유로 즉, 우리돈 약 70만원 이상은 은행에서 인출이 불가하니 탈세는 근본적으로 불가능 하단다.

육아휴가를 49주에서 59주를 주기에 출산율이 높고, 오슬로는 강을 기준으로 강서와 강동으로 구분을 하고 있단다.

 

 

 

 

▼ 이곳에는 말이 많다고 하였는데 말이 보인다. 헌데 달랑 1마리다.

무스은.... 말이 많타며??

그런데 이 의문증은 여행내내 가시지 않았다.

양, 말 목장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백, 수천마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부업식으로 키우는 것처럼 보였다.

 

 

▼ 오슬로 시내로 진입하며 그 풍광을 담아 보았다.

 

▼ 덴마크와 마찬가지로 200 ~ 300년 된 건물들이 주로 보인다.

그럼 고층건물은 없는 건가??

아마도 신시가지는 따로 있는 듯 싶다.

 

▼ 휴가시즌으로 인적이 드문 것인지....?? 매우 한가한 도로가 시선을 당긴다.

 

  비겔란 조각공원은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천재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조각 작품을 모아 놓은 곳으로 삶의 온갖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212점의 작품들을 전시한 공원이다.

조각가 비겔란은 무척이나 가난했으며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운명과 조각에 전념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때 비겔란의 천재성을 안 오슬로 시에서 그에게 의식주에 대한 걱정 없이 조각에 전념할 것을 부탁하여 탄생한 것이 이 비겔란 조각공원이고 이곳의 작품은 모두 영구히 시의 소유가 되었다.

작품은 아이와 노인, 기쁨과 슬픔 등 삶의 모든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람들이 뒤엉켜 하늘로 올라가는 탑이 시선을 잡아 끈다.

특이한 것은 이곳에 있는 비겔란의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고 한다.

보는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서 제목을 붙이면 된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문외한으로 작가의 그 심오한 뜻을 헤아리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화가난 아이' 조각만큼은 표정이 정말 그저 재미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사람들의 손길에 왼손이 달아 번들 거린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아내도 아이의 손을 잡아본다.

대칭으로 꾸며진 정원을 지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모노리스 석탑에 오르기 위해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또 하나의 철제문이 나타난다.

철사를 이용하여 각기 다른 연령층의 남자를 주제로 인간모습의 선을 섬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모노리스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면 비겔란의 최고 걸 작품인 모노리스(Momolith)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모노리스란 원래 하나의 돌(통돌)이라는 뜻인데 17m의 화강암에 121명의 남녀가 뒤엉킨 형상을 조각한 작품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투쟁, 희망과 슬픔을 농축시켜 인생에서 낙오되지 않고 안간힘을 다하여 정상을 차지하려는 원초적인 감정 상태를 역동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위의 작고 수직으로 서 있는 사람으로부터 아래쪽으로 내려오며 몸집이 커지고 수평을 이루는 자세를 통해 갓난아이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노인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비겔란에 의해 디자인된 석고모델을 3명의 석공이 14년간에 걸쳐 돌을 쪼아 완성시킨 작품이라고 하며, 비겔란이 죽기 바로 직전인 1943년도에 완성되어, 그가 죽은 후인 1944년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모노리스를 지나 공원 끝까지 가려면 다시 철제로 만든 후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적나라하게 그려진 여성들이 주제다. 이 문을 나서면 중간에 해시계가 있다.

그 해시계 우측으로 진행하면 숲길을 지나 주차된 버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후문이다.

 

▼ 10:29분 첫번째 관광코스인 비겔란 조각공원에 도착하였다.

 

 

 

 

 

▼ 이 동상의 주인공이 비겔란

 

▼ 가이드에게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데 사전 준비가 없다면 도데체 무슨말인지 알 수가 없을 듯 하였다.

사진 찍으랴 미리 컨닝하랴 집중이 않되는 것이다.

 

▼ 하나 하나 제대로 감상할 시간이 없다. 대충 문자그대로 주마간산 격으로 보며 지나 가게 된다.

200점이 넘는 작품들을 언제 제대로 감상하리오??

더욱이 이런 미술작품에 대하여는 대부분이 문외한이 아니던가??

 

▼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가장 많았던 "화가난 아이"

 

▼ 소풍나온듯 한 초등학생들과....

 

 

▼ 가장 높은 곳에 설치한 "모노리스(Momolith)"

비겔란의 최고 걸작품이란다.

 

모노리스란 원래 하나의 돌(통돌)이라는 뜻인데 17m의 화강암에 121명의 남녀가 뒤엉킨 형상을 조각한 작품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투쟁, 희망과 슬픔을 농축시켜 인생에서 낙오되지 않고 안간힘을 다하여 정상을 차지하려는 원초적인 감정 상태를 역동적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위의 작고 수직으로 서 있는 사람으로부터 아래쪽으로 내려오며 몸집이 커지고 수평을 이루는 자세를 통해 갓난아이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노인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비겔란에 의해 디자인된 석고모델을 3명의 석공이 14년간에 걸쳐 돌을 쪼아 완성시킨 작품이라고 하는데, 비겔란이 죽기 바로 직전인 1943년도에 완성되어, 그가 죽은 후인 1944년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 모노리스 앞에서 공원전체를 내려다 보고....

 

▼ 해시계를 만난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만든 해시계를 카피한 것은 아닐텔지....??

 

▼ 11:20분 어?? 사진을 찍다 보니 지각을 했다.

일행들에게 핀잔을 들었는데 은근히 미안 미안!!

우리 버스는 후문같은 곳 도로상에 주차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