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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일(8월 23일, 토요일) 2. 아르바트거리, 붉은 광장, 무명용사의 묘

김창주(아차산) 2014. 11. 25. 15:41

 

11(823, 토요일) 모스크 시내 관광 후 모스크바 세레메티예보 공항으로 이동 출국 (SU250 21:40)

<노랑풍선의 일정표>

SU035 (06:10) 항공편으로 모스코바로 이동 1시간 20분 소요

 

크레물린 궁 : 우즈벤스키 사원, 12사도 사원, 대포의 왕, 이반대제의 종루, 붉은광장 및 무명용사의 묘, 굼 백화점(모스코바 최대 백화점 : 2013년에 120주년), 모스코바 국립대학교 전경 및 참새언덕(렌닌언덕)

 

성 바실리 성당 전경, 아르바트 거리 : 한국의 인사동

 

11(823, 토요일) 2. 아르바트거리, 붉은 광장, 무명용사의 묘

 

<실 제 일 정 표>

02:50분 기상(전날 11시에 취침)

03:24분 호텔출발

04:18분 상트폐제르부르크 공항 도착

05:37분 비행기 탑승

07:18분 모스코바 세레메티예보 공항 도착

 

09:21분 아르바트 거리

10:42분 붉은 광장, 무명용사의 묘

 

11:22분 굼백화점, 크레물린광장, 바실리 성당

12:54분 점심식사

 

14:07분 참새언덕

14:45분 노보데치 수도원

 

15:43분 차이코프스키 호수공원

16:32분 공항으로 이동시작

17;55분 모스코바 세레메티예보 공항 도착

 

21:23분 비행기 탑승

 

824일 일요일 11:15분 인천공항 도착

 

 

  아르바트 거리

  모스코바에 아침 일찍 입성한 관계로 갈곳이 마땅치 않다는 현지가이드님 말씀이다.

하는 수 없이 서울의 명동거리로 판단되는 아르바트 거리를 먼저 가잔다.

 

  아르바트 거리는 보행자의 거리로 외국인들을 위한 기념품가게, 젊은 음악가들, 무명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며, 음악과 러시아를 대표하는 젊음과 개방의 거리로 외무성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입구에 맥도날드 매장이 있어 급한 용무를 간신히 해결하게 되었다. 맥도날드는 화장실이 부족한 북유럽과 이곳 러시아에서 일반 시민에게도 화장실을 무료로 사용하게 하고 있었으니 여행자들에게는 천국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아르바트 거리 초입에는 아름다운 아내 나탈랴와 푸슈킨의 동상이있다.

푸쉬킨의 아내의 미모가 뛰어나 그로 인해 결투를 하게 되었고 푸쉬킨은 젊은 나이에 절명을 하였다 하니 미인을 아내로 두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닌가 보다. 이곳은 푸쉬킨이 유년시절 뛰놀던 거리로 러시아 '몽마르뜨'로 불리는 곳으로 15세기 시대의 건물들이 모여있는 거리로써 러시아 귀족문화의 정점이다.

 

 

 

 

 

 

 

 

 

 

 

 

 

 

 

 

▼ 외무성 건물!!

 

 

 

 

 

 

▼ 붉은 광장과 무명용사의 묘

 

  붉은 광장 모든 사람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이미 익숙한 장소가 붉은 광장이다.

 이 곳은 구 소련 시절 51일 메이데이와, 사회주의 정권 탄생을 축하하는 117일의 혁명 기념일에 기념 퍼레이드가 열렸던 곳으로, 지금은 공산주의자의 데모행렬이 눈에 많이 띄고 있다.

 

  크레믈린 북동쪽의 붉은 성벽과 붉은 벽돌 건물의 국립 역사 박물관, 굼 백화점, 그리고 양파 머리 모양의 바실리 사원에 둘러싸여 있다. 총 길이 695m,130m,넓이 약 73,000미터에 이르는 러시아 최대의 광장으로 수많은 러시아 역사의 산 현장이었다.

 

  이 곳을 붉은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라스나야이(Красная)'라는 러시아의 고어에서 유래된다.

원래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크라스나야라는 말은 지금은 붉은 광장이라는 말로 의미가 통하고 있지만 본래는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15세기 말에는 단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Torg(시장)라고 불렸으나 1571년 발생한 화재로 점포들이 불타버린 뒤 개칭되었다. 그 이후에 키타이 고르드 지역을 17세기에 정리하여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19세기 말 무렵이다.

 

  붉은 광장의 퇴적토는 두께가 약 4m라고 하는데 1세기에 1m의 비율로 토사가 쌓인다고 한다.

이 사이에 붉은 광장을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수는 알 수 없으나 그 가운데는 역사의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급보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타타르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중들이 모였던 때도 붉은 광장이라고 불리기 전이며 미닌과 보차르스키가 폴란드군을 격퇴 시킨 것은 광장에 토사가 축적되기 시작했던 때이다.

 그 직후 농민반란의 주모자 스테판 라진이 처형되었으며, 적토가 2m정도였을 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입성 했으며, 3m정도였을 때는 혁명군(적군)과 반동세력(백군)간의 과격한 투쟁의 흔적이 깔리기도 했다.

 

  세계역사의 많은 등장인물이 족적을 남긴, 러시아 사회의 변동의 무대가 된 붉은 광장은 지금은 돌로 뒤덮이고 말았지만 격동의 역사를 상상하게끔 한다.

 

 

 

 

 

 

▼ 레닌의 유해를 고기 위하여 늘어선 인파!!

우리 일행들은 저 인파에 눌려 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하엿다.

 

 

▼  무명용사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