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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 내

백령, 대청도 6. 대청도로 이동(초록별 펜션)

백령도, 대청도 제 2 일차 

 

6. 대청도로 이동(초록별 펜션)

 

생애 처음 맛보았던 백령도 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백령도와 헤어지고 대청도를 만나기 위해 백령도의 관문인 용기포항으로 이동한다.

 

백령도을 떠나면 아쉬운 것이 하나 남아 있으니 백령도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중화동 교회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하필이면 중화동 교회에서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하여 임시 폐쇄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백령도를 떠나며 서운한 마음으로 중화동 교회에 대한 자료를 올리면서 위로해 본다.

 

중화동 교회는 19세기 초부터 백령도지역에서 전개된 기독교의 선교역사를 모아

기록을 정리하여 현실감 있게 전시한 서북해안 유일의 기독교 역사기념관이자,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오래된 교회로 기독교 유적지라 보면 되겠다.

 

18169월 영국군함 2척이 대청군도 앞바다에서 탐사를 시작하였다.

소형보트로 포구에 다가가 주민들의 호기심도 끌고 선교의 가능성도 타진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니

이 포구가 후일 백령도 최초의 모 교회를 탄생시킨 중화동포구다.

 

독일태생의 귀츨라프선교사는 극동 아시아에 대한 통상교섭 임무를 띠고 순방하던 중

18327월 장산곶을 지나 남하 하다가 갑작스런 해무를 만나 백령도 중화포구에 도착한다.

이때 중화동 주민들은 우호적으로 귀츨라프일행을 맞이 하였으며,

 ‘귀츨라프는 성경과 전도지 등을 나누어 주며 전도를 하게된다

 

중화동 교회는 당상관 허 득의 주도로 주민들에 의해서 세워진 자생교회이며 백령도의 모 교회다.

허 득은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어 18989월 소래교회로 달려가

백령도에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는 뜻을 서경조장로에게 밝힌다.

그 해 10월 중화동의 한문서당에서 많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경조장로의 집전으로 중화동교회 설립예배를 드린다.

 

당시 황해도지역의 선교를 지휘 감독하던 선교사 언더우드목사는 중화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각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지금은 백령도에 군 교회 2개소를 포함하여 12개소의 교회,

대청도에 4개소와 소청도에 1개소의 교회가 설립되어 모두 17개소의 교회가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백령도에서 펼쳐진 소중하고 값진 초기 한국기독교사의 내용이며,

원두우라는 한국명을 가진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다.

중화동 교회는 우리나라 장로교회 중 3번째로 지어져 106년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교회다.

중화동교회기념관은 옹진군에서 3억원을 투입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와 인천노회 및 백령 시찰회의 기도후원 등으로 추진됐다.

만나지 못했던 그 중화동 교회 사진을 넷상에서 옮겨 보았다.

 

<대청도와 소청도 개념도>

 

 

 

<대청도 삼각산과 관광지 개념도>

<대청도와 소청도>

행정구역수 17개리에 15마을로 이루어진 천혜의 땅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상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한다.

 

인천에서 북서방면으로 220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대청도는

주민들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어촌지역으로

80년대 말까지는 홍어잡이가 크게 성황을 이루었던 곳으로

현재에도 다양한 어종과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섬 전체가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이곳을 사수하는 부대가 흑룡부대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그전에는 들어가려면 절차가 복잡 했지만

요즘은 아무런 입도절차 없이 갈 수 있다.

 

대청도는 면소재지 섬이지만 면적은 12.63, 해안선의 길이는 24.7로서 백령도의 4분의1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히려 도보여행이나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대청도에는 일주도로가 잘 닦여있어서 똑같은 구간을 중복해서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는 일은 피할 수 있다.

다만 섬 전체가 산악지형이라는 특성상 오르막 구간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서 체력을 안배해야 된다.

 

대청도의 해변에는 대부분 모래가 깔려 있다.

대청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수욕장인 지두리해변을 비롯해 사탄동해변, 답동해변, 농여해변,

옥죽동해변 등이 모두 모래해변이다.

특히 농여해변과 답동해변 사이의 대청도 북쪽 해안에 위치한

옥죽동해변에는 길이 2km, 1km 규모의 광활한 모래사막도 형성돼 있다.

옥죽동 해변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형성된 모래사막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옥죽동해변과 이웃한 농여해변은 시원스런 백사장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이 독특한 풍치를 자아낸다.

 

대청도의 남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지두리해변은

삼면이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어서 언제 찾아가도 아늑하다.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바람과 파도가 비교적 잔잔한데다가 해변의 수심도 얕은 편이다.

길이 1km, 300m의 백사장은 한눈에 보기에도 넓고 시원스럽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가족 단위의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

 

지두리해변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서면 사탄동해변이다.

해수욕장으로 내려서기 직전의 고갯길에서 바라보면,

해수욕장 주변의 지형이 마치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바다에 엎드려 있는 듯한 형상이다.

 

새의 오른쪽 날개 앞에는 아담하고 깨끗한 사탄동해변이 펼쳐져 있다.

유달리 모래가 많아서 모래 ''''''''(), 여울 ''''''''()자의 ''''사탄동''''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길이 1km, 너비 100m쯤 되는 사탄동해변 근처에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동백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제66)가 있다.

이른 봄날이면 붉은 동백꽃이 만개한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사탄동해변에서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올라서면 독바위해안과 소청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당도한다.

독바위는 수만 겹의 결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갯바위인데,

그 풍광이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큼 웅장하다.

 

대청도의 남쪽에 위치한 소청도는 전체면적이 대청도의 4분의 1쯤에 불과하다.

그곳에도 간과할 수 없는 해안절경이 있다.

특이하게도 온통 하얗게 분칠을 해놓은 듯한 분바위가 그것이다.

달빛을 받으면 하얀 띠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월띠''''라고도 불리는 분바위는

사실 6~10억 년 전쯤 형성된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화석이기도 한

''''소청도 스트로마톨라이트 및 분바위''''는 모양이 아름답고 보존가치가 높아서

 천연기념물 제508호로 지정되었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바다나 호수 등에 서식하는 남조류나 남조박테리아 등이 만든 석회암 화석의 일종이다.

소청도 선착장에서 분바위까지 가려면 도보로 약 30분쯤 걸린다.

 

소청도 서쪽 끝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는 소청도등대가 서 있다.

1908년에 세워진 이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황해도의 서남쪽 바다를 거쳐 중국 산둥반도와 발해만의 여러 항구로 가는

선박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숙박이 가능한 개방등대는 아니지만, 일반인들도 자유로이 관람할 수는 있다.

선착장에서 등대까지는 도보로 왕복 2시간쯤 걸린다.

소청도는 바다낚시터로도 유명해서 수백 명의 낚시꾼들이 참여하는 낚시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 대청도로 넘어 가기 위하여 용기포항 여객 터미널에 도착하였는데,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한담을 나누면서 '하머니 플라워 호'를 기다리는데 좀 지루한 시간이 되었었다.

   ▼ 인천에서 백령도 입도 당시 탑승 했었던 '하머니 플라워 호'에 재승선 하여 대청도로 이동하게 되는데

'인천 ~ 백령도'를 운항하는 또 하나의 선박인 '코리아 킹'의 모습이 바로 옆에서 포착된다.

그 코리아 킹 뒤로 산봉우리 하나가 보이는데 평지로 이루어진 백령도에서 단 하나 뿐인 용기원산이다.

 

용기원산은 높은 산이 없는 백령도에서 산꾼들이 가끔 오르는 산이기도 하다.

200m가 넘는 산이 없으니 섬이 거의 밭이거나 논으로, 산정에는 백령도 인근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을 인도하던

등대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산 아래 남쪽해안 에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하니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 보았던 용기포 등대 해변이라 칭하고,

용기포와 용기원산은 원래 섬이었으나 연안사주의 발달로 백령도와 연결된 전형적인 육계도란다

   ▼ 백령도 용기포항에서 출항한 '하머니 플라워' 호는 불과 20여분 만에 대청도 항에 도착하게 되고,

   ▼ 대청도 항에 하선하여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소쿠리에 담겨진 삼치(??)로

백령도는 평야지대로 농업을 주로 하지만, 이곳 대청도는 대부분이 산지로 농사가 곤란하여

오직 수산업으로 먹고 사는 섬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하는데,

꽃게는 만나 볼수 없었으니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 작업으로 그 씨가 말라 버렸다는 것이다.

한편, 대청도 주민은 약 1,500명 이고, 해병대 소속 군인의 숫자는 2,500명이나 된단다.

   ▼ 백령도에서는 45인승 대형버스를 이용하였었는데

대청도에서는 '별쌈금 펜션'의 정 창호 사장님께서 운용하는 15인승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령도에서는 제법 많은 수의 일행들이 있었으나, 절반 이상은 인천으로 돌아가고 

이 대청도 투어에는 단 12명 만 참석하는 상황으로 굳이 대형버스는 불필요한 상황이었다.

 

  정 창호 사장님은 대청도 토박이로 버스를 손수 운전하면서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별쌍금 펜션'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백령도 '서해여행사' 사장님과는 친구사이라고 본인 소개를 하고 있었는데

2박 3일간 겪어본 바 성품이 매우 소탈하면서도 성실하게 관광객들을 리딩하는 분이었다.

심지어는 우리가 인천으로 돌아 가는 중에도 안전하게 귀가하라는 전화를

배가 출발하고 한 번, 인천항에 도착하자 마자 또 한 번 즉, 2번이나 주시어 놀라게 만들었었다.

▼ 대청도 항을 벗어나 이동을 시작하여,

  ▼ 그 정창호 사장님이 운영하는 '별쌍금 펜션'에 짐을 풀고 약 30여 분 휴식 시간을 갖게 되는데

이 펜션에는 방이 12개를 운용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깔끔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