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일 11월 27일(목요일) 2. 이화원 관광후 장가계로 이동
<하나투어 일정>
만리장성(거용관 도보관광) : 50분
이화원
18:35분 북경수도공항 출발(CA 1359) - 2시간 40분
21: 15분 : 장가계 허화공항 도착
장가계 도착하여 석식
<실 제 일 정>
05:30분 모닝콜
06:39분 아침식사(호텔식)
07:38분 호텔출발
08:46분 만리장성 팔달령 도착
10:21분 팔달령 출발
10:56분 점심식사(교자연)
12:44분 이화원
15:51분 북경 수도공항 도착
18:03분 보 딩
21:32분 장가계 허화공항도착
21:55분 저녘식사
23:11분 호텔도착(풀만호텔)
01:30분 취침
이화원(베이징 서쪽 해정구/아이디엔취, 베이징에서 15KM거리) : 50분 소요
이화원(頤花園)은 청나라의 서태후가 사랑한 여름 별장이었다.
북경시 중심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24년 공원으로 바뀐 이곳은 산과 호수를 끼고 있어 경관이 아름다운 중국 북방의 정원으로 세계적으로도 풍경이 좋고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황실정원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공호수는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고 여름에는 보트와 유람선을 타며 뱃놀이를 즐기는 곳이기도 했다.
이화원은 1153년 금(金)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가 되었고 원(元)시대에 만수산과 곤명호 등을 만들었으며 1764년 청(淸)의 건륭제가 개축해 “청의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1860년 제2차 아편전쟁과 그 후에 일어난 의화단사건으로 건물들이 많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완파되지 않아 청의 광서제 때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명칭도 “이화원”으로 변경했다.
또한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해군 군자금을 유용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곳의 주요 볼거리는 만수산과 곤명호, 서호, 남호 등 3개의 호수로 구성되었고 전체면적은 약2.9제곱Km(300.59ha)이며 호수가 4분의 3인 2.2제곱Km를 차지하고 있다. 이화원 안의 호수주변에는 다양한 형식의 궁전, 원림, 고대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건물 안에는 진귀한 문화재가 많이 수장되어 있다고 했다.
이화원은 북경 서북부의 해정구에 위치한 정원으로 공원이자 궁전이다
주로 60m 높이의 만수산과 쿤밍호에 많은 공을 들여서 공사를 하였으며 이화원의 면적은 2.9평방 킬러미터이고 이중 4/3이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쿤밍호는 2.2평방 킬러미터를 차지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고, 여기서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데 사용되었으며 7만 평방미터의 공간에 궁전과 정원그리고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이화원과 서태후>
이화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태후를 알아야 할 것 같아 간단히 살펴보았다.
서태후(1835~1908)는 만주족 중급관리의 4남 4녀중 넷째 딸로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가난해 궁녀가 되기를 원하다가 1851년 16세에 드디어 궁녀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의 환관들에게 잘 보여 황제가 나타나는 시간에 노래를 불러 이 노래에 반한 함풍황제의 눈에 띄게 되고 황제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동치제)을 낳아 일약 귀비가 되었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과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서히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자 황제도 곱게 보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등으로 함풍제가 죽었다.
이에 유일한 후계자인 6세의 동치제가 황제가 되자 황태후가 되어 28세 때부터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마침내 그녀의 시대가 열렸으니 48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다. 다음 황제인 광서제 때 그의 동생 순진왕의 3살인 아들을 황태자로 옹립했다.
유폐되었던 광서제가 38세로 요절하자 황태자인 부의가 황제로 등극했다.
정치적으로 최고의 권력을 장기간 휘둘렀던 서태후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는데 그 가격은 엄청났다고 했다. 또한 옷도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입었고 보석에 대한 애착도 대단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일시적인 피서와 요양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이화원에 각종 전각과 사원 및 건물들을 지었다.
이곳을 본격적으로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 형태로 변경했고 주로 이화원에서 수렴청정을 했으며 서태후는 1889년부터 죽을 때까지 19년 동안 줄곧 이곳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크지 않은 정원에 버티고 서 있는 수성석(壽星石)이 반겼다.
광서 12년(1886) 이화원 재건 때, 북경대학교에서 옮겨온 것으로, 색상이 푸르고 윤이 나며, 모양이 기이해서 마치 수성 같아 수성석이라고 했단다. 그 옆에는 오래되었으나 푸르고 늠름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정원 왼쪽에 이화원을 소개한 안내판에는 5개국 글씨가 쓰여 져 있었는데, 거기에 우리 한글도 있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은 탓이겠지만, 괜히 가슴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이화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비가 서 있었으며, 앞에는 인수전(仁壽殿)이 앞을 가로 막고 서있었다.
인수전은 서태후와 광서제가 정무를 보던 집무실로, 건륭 15년(1750)에 건립했다.
그러나 1860년 2차 아편전쟁 시 영불연합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서 12년(1886)에 재건한 것이었다.
인수전 현판 아래에는 대원보경(大圓寶鏡)이라는 작은 현판이 있었다. 인수전 앞에는 황제의 상징인 동향로(銅香爐), 동봉황(銅鳳凰), 동기린(銅麒麟), 동룡(銅龍)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궁전과 달리 황제의 최고의 상징인 동룡이 왼쪽 제일 끝에 서 있고 동봉황이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권력관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실질적으로 서태후의 권력이 광서제 위에 있었던 것이었다.
▼ 인수전 현판 아래 대원보경이 있고 동룡과 동봉황이 있는데 동룡이 제일 왼쪽에 있음
▼ 인수전을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곤명호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장랑(長廊) : 건륭 15년에 창건했으나, 영불연합군에게 소실되었다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광서 15년에 재건했다.
장랑은 동쪽 요월문(邀月門)부터 서쪽 석장정(石丈亭)까지 모두 273칸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총길이 728m의 대들보에는 인물, 산수, 화초, 조류 등 각종 채색화 8천여 폭이 그려져 있는, 중국 고전 원림 중 최고의 길이를 자랑하는 긴 복도였다. 장랑 중간에는 류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淸遙) 등 8각 처마 정자가 4개 있었다.
장랑의 용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호수를 구경하기 위하여 만든 긴 복도이다.
장랑은 중국 고전문학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한 1만 4천여점의 회화로 정교하게 장식된 산책로인데 그 그림들은 원본 그대로 인데 보수를 하려고 해도 원본을 그르칠까 자어 되어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단다.
▼ 장랑을 지나면 배운전(排雲殿)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만수산을 따라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불교 사찰인 불향각(佛香閣)이 배운전 뒤에서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는 배운문까지만 돌아보고, 불향각은 올려다보기만 했다. 서호와 남호 주변에도 문, 다리, 정자 등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으나, 그것을 모두 보기에는 시간과 힘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가이드가 여기까지만 보고 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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