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1. 아차산의 지명에 대하여.... (향토사학자 김민수)
아차산 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아차산을 아끼산, 액끼산, 에께산, 액계산, 액개산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이러한 명칭의 원래 말은 『경기지』양주 조에서 화양사(지금, 영화사)는 악계산(嶽溪山)에 있었다는 기록에서 악계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 주위의 사방으로 계(溪)가 들어 있는 지명들은 청계산(淸溪山), 청계천(淸溪川), 상계동(上溪洞), 퇴계원(兎溪院) 등이 있다. 계(溪)는 한자에서 글자 모양이 다르나 우리 소리에서는 같은 鷄(계)와 더불어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곰족(濊)을 나타내는 말이다. 嶽(악)은 바위로 이루어진 험한 산에 붙여진다. 따라서 악계산은 험한 곰족의 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 『세종실록』, 『대동지지(大東地志)』, 『대동여지도』등 잘 알려진 책이나 지도에서는 峨嵯山(아차산)이라고 하였다. 『대동여지도』로 볼 때, 지금은 나뉘어져 있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모두 아차산 이었다. 여기만이 아니고 상봉동 터미널 북쪽에 있는 봉화산(烽火山)도 아차산 봉수대라고 하였으므로 이 지경까지도 아차산이었다.
이러한 지경의 아차산은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松子大全)』「희정당주차(熙政當奏箚)」조에서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더불어 지금의 건원릉에 와서 죽고 묻힐 자리를 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근심을 잊었으므로 여기서 서쪽의 아차산 능선을 가리켜 망우리(忘憂里)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후 『망우동지(忘憂洞誌)』에서 한술 더 떠서 태조 이성계가 검암산(지금 동구능)에 자기가 죽어서 묻힐 터 자리를 잡고, 아차산 북쪽 산마루에 이르러 이제 근심을 덜었노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연유에서 이곳을 망우리라고 하였다는 데에서 망우산이 명칭이 따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건원능(이성계의 무덤)은 이방원(太宗)의 수하인 하륜이 이성계가 죽고 난 다음에 검암산에 있는 절(寺)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조성한 것이므로 이러한 기록들은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과 더불어 한양 사람들의 묘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망우산의 이름은 굳어진 것이다. 용마산 지경에는 아기장수의 전설이 있다. 아기장수의 전설에서 날개 달린 말(龍馬)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지명 조에서 아차성(阿且城)과 더불어 용마산(龍馬山)이 나타나 있으므로 여기에 연유하여 용마산 또한 갈라져 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삼국사기』에서 아차성(阿且城) 또는 아단성(阿旦城)이라고 처음 언급한 아차산에 있는 성(城)의 이름이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는 남한강 상류의 충북 단양군에 있는 온달산성 지경의 옛 이름이 을아단현(乙阿旦縣)이었으므로 이를 웃(乙) 아단성으로 보고, 한강 하류의 광진구의 아차성을 아랫 아단성인데 그냥 아단성이라고 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광진구의 아단성(阿旦城)은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단(旦)에 저촉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차(且)로 고쳤다고 하였다. 『삼국사기』는 태조 이성계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이러한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설령 『삼국사기』가 조선시대에 다시 쓰여졌다고 하더라도 남한강 상류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의 지명을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단(旦)을 피하여 을아조현(乙阿朝縣)으로 바꾸었으므로 광진구의 아단성(阿旦城)이 맞는다면 이러한 원칙에 따라 아조성(阿朝城)으로 바꿨어야 옳았다. 뿐만 아니라 남한강 상류의 온달산성 지경의 을아단현(乙阿旦縣)과 한강하류 광진구 지경의 아단성(阿旦城) 사이에는 무수한 백제의 성(城)들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유독 두 성(온달산성·아차성)만을 지목하여 웃 아단성과 아랫 아단성이라고 하여 대비시켰다는 것도 상식 밖의 일이다. 근래에 옛 말을 연구하는 국어학자는 을아단현(乙阿旦縣)의 乙(을)은 웃(上)의 뜻이라기 보다는 마을 또는 갈래를 나타낼 때에 쓰이는 어미 ㄹ의 받침으로 해석하고 있으므로 더욱 그렇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그의 비석에서 아리수(阿利水)를 건너서 백제를 굴복 시켰다고 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은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고치는데 욱리하(郁里河)의 돌을 캐서 쌓았다고 하였다. 아차산 남변의 한강을 삼국시대에는 아리수(阿利水) 또는 욱리하(郁里河)라고 한 것이다. 아(阿)의 다른 소리는 옥으로도 발음된다.
한글이 없었던 삼국시대에는 우리의 소리를 한자의 소리에서 비슷한 것을 골라 표기하였을 것이므로 阿(옥)과 郁(욱)은 기실 같은 표현이다. 따라서 한강의 옛 이름인 阿利水는 아리수라고 하지 않고 옥리수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을 따라서 옥수동(서울), 옥천동(구리시), 옥천면(양평) 등의 명칭이 지금껏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한강의 옛 이름은 옥리수(阿利水) 였다.
阿且(차)城의 且(차)는 저로도 다르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阿且(차)城은 옥차성과 옥저성으로 달리 부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또한 阿旦(단)城은 옥단성이다. 옥차성, 옥저성, 옥단성 중에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성은 옥저성이다.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가 있음이 그렇다. 阿且城은 沃沮城(옥저성)과 같은 명칭으로서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에 두루 쓰이는 일반명사인 것이다. 충청남도 홍성군에도 아차산(峨嵯山)이 있으며, 전라남도 나주군의 옛 이름 또한 아차산군(阿次山郡) 이었음이 그렇다.
그렇다면 왜 阿且城(옥저성)이라고 하지 않고 조선시대의 저술인 『고려사』에서부터 峨嵯山이라고 하였을까.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진한전(辰韓傳)은 朝鮮(낙랑) 사람들은 我(우리)를 阿(옥)이라고 한다고 하여 阿殘(옥잔)이라고 능멸하였다. 阿殘, 百殘(백잔), 利殘(이잔)들은 모두 오랑캐의 개념이다.
조선시대는 중국을 숭상하였던 유교주의에 근본을 두었다. 그래서 오랑캐의 개념인 阿를 꺼렸다. 따라서 阿(옥)의 소리를 따르지 않고 뜻을 따라서 我(아)라고 하였다. 산에 관계된 지명이므로 山변을 덧붙여서 峨라고 한 것이다. 또한 且(차) 역시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旦(단)과 혼동할 소지가 있으므로 差(차)로 하여 확실하게 구별 지었다. 마찬가지로 산에 관계된 지명이므로 山변을 첨가하여 嵯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峨嵯山이다
2. 고구려 유적 보고(寶庫) '아차산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3백미터 남짓되는 야트막한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들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40분 정도의 등산로를 오르면 한강과 서울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일품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이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에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루 20여개가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 군사유적으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4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아차산 곳곳에서는 멀리 팔당댐과 서울 강북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특히 아차산 대성암 뒤 바위산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모습은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 특히 여름의 끝자락부터 가을로 이어지는 계절에 추천하고 싶다.